1991년 카자흐스탄서 은밀히 반출···포병사령부 산하 화학중대에 전력화
말레이시아 보건 당국이 지난 2월 26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VX 점검·제독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내부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이 VX를 처음 들여온 때는 1990년대 초의 일이다. 복수의 소식통을 통해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1991년이 유력하다. 일단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1990년 구소련이 붕괴됐다. 그 테두리 안에 있던 여러 공산권 위성국들이 잇따라 독립했다. 위성국들은 보유하고 있던 전략무기를 대부분 반납 및 해체했다. 한 마디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1990년 공산권 붕괴가 곧 북한 내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부문의 군사기술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이때다. 극도의 혼란기 속에서 북한은 고급 군사기술을 보유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 독립국에 공작조들을 보냈고, 주요 기술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빼내오려는 시도를 했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물론 핵심은 핵 및 전략미사일 관련 기술이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 연재(1227호 기사 참조)를 통해 잠시 언급한 바 있다. 이때 카자흐스탄에선 너덧 개의 핵배낭이 사라지기도 했다. 바로 특별 임무를 받고 카자흐로 급파된 북한 인사들의 소행이었다. 여기서 훔쳐온 것들은 훗날 북한 핵미사일 기술 증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일부 핵기술과 함께 들여온 것이 바로 생화학무기와 관련한 기술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VX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앞서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때 VX의 화학식 및 핵심기술공정 도면, 표본, 독성실험과 관련한 자료 등이 북으로 건너갔다. 정확한 주체는 알 수 없지만, 당시는 당 35호실 산하였으며 지금은 정찰총국 산하로 개편된 해외정보국(5국) 요원들이 유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이 VX를 들여온 과정은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이다. VX는 UN이 대량살상무기로 규정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거래 및 반출 자체가 금지돼 있다. 애초 VX가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온 과정도 그리 정상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1952년 영국에서 개발된 VX는 미국으로 기술이 이전되면서 실용화 단계에 이른다. 문제는 냉전시기 VX기술이 동독(통일독일 전) 요원들에 의해 공산권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동독을 통해 VX는 구소련으로 넘어갔고, 위성국 카자흐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다. VX 자체가 상당히 음지적인 프로세스를 거쳐 북한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북한의 VX 실용화 및 생산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VX는 현존하는 신경작용제 계열 화학물질 중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로 분류되지만 그 생산 공정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화학공업 기술이 자리했다는 전제하에 화학식과 공정도면과 샘플만 있다면, VX의 실용화 및 생산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이전에 북한 정권은 구소련으로부터 1970년대를 전후로 대부분의 화학무기 관련 기술을 거의 (정상적·비정상적 방법 포함해) 전수받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VX는 이미 북한의 주요 화학무기 생산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북한의 기본적인 화학공업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나일론에 이은 세계 두 번째 화학섬유 ‘비날론’이 개발된 곳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 이승기 박사가 석회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든 ‘비날론’은 북한의 높은 화학공업 기술을 증명하는 표본 중 하나다.
스위스 주재 북한대표부 주용철 참사는 2월 28일 고위급 군축회담에서 “북한은 화학무기를 생산하고 보유하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라며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 사건에 대한 의혹과 가정을 전면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전혀 맞지 않은 부분이다.
북한은 기본적인 화학공업 기술은 물론 화학무기 개발 및 생산에 있어서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는 북한의 핵기술과 함께 또 다른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1960년 소련의 도움으로 화학무기 개발 및 생산을 시작한 북한은 현재 20여 종 5000톤에 달하는 화학무기용 원재료를 보유하고 전력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철저하게 권역별로 분산 저장 중이다. 이는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화학무기 보유 규모만 놓고 볼 때 북한은 전 세계 3위 수준에 해당한다.
특히 북한은 현재 주목받고 있는 문제의 VX와 사린 등 신경작용제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신경작용제는 김정남의 경우처럼 개인적 피살의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다 범위를 넓혀 전술적인 용도로도 쓰임이 용이하다. 특히 이번 김정남 피살에 사용된 VX는 사실상 북한군 총참모부 산하 포병사령부 각 연대에 배치된 화학 중대 단위까지 모두 전력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2월 28일, 군축회담을 통해 김정은 피살 이후 처음으로 ‘화학무기’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화학무기 전력화를 총체적으로 지도하는 곳은 군 총참모부 산하 핵·화학방호국(핵 분야는 사실상 타 기관으로 분리 및 독립)이다. 하지만 이를 실제 생산·관리·보관 관련 연구지도 사업을 기본적으로 관장하는 곳은 함흥과학연구분원(북한 국가과학원 산하 기관이며 제2경제위원회의 지도를 받음) 일용국이다. 참고로 북한에서 ‘일용’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론 날마다 사용하는 공산품(생필품)을 뜻하지만, 실제론 일반 공장 기업소에서 생산하는 군수품을 뜻한다. 일종의 대외용 은어인 셈이다.
함흥과학연구분원 일용국은 북한 화학무기용 재료를 생산하는 열두 곳의 공장을 관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평안북도 삭주의 청수화학공장 일용공장(수포작용제 등 화학독소를 주로 생산), 평안남도 순천석회질소비료공장 일용공장(시안화수소), 함경남도 함흥의 제2.8비날론연합기업소 일용공장(기타 유기화학물질용 독소물질)과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일용공장 등이 포함된다.
이밖에도 북한은 화학무기용 재료 생산을 연구하는 복수의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러한 연구소들은 자강도 강계(26호 공장 부근에 위치), 평안북도 신의주(신의주화학섬유연합기업소 내 위치), 함경남도 흥남(흥남화학연합기업소 내 위치), 평양시 룡성(제2자연과학원 내 위치) 등에 분산돼 있다. 특히 강계의 연구소는 ‘생물화학연구소’로 별칭하며 북한 화학무기의 전력화를 꾀하는 핵심연구소로 꼽힌다.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 상 김정남 피살 배후에 북한 당국이 자리하고 있음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북한이 김정남의 제거 방식으로 독살을 택한 것도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북한이 주요 생산 목록에 두고 있는 신경작용제 VX를 사용했다는 점은 결코 그냥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