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출마 철회” 해단식이 출정식 열기
지난 2월 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차량을 타고 떠나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반 전 총장의 최측근인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이 이끌고 있는 충청권 명사모임 백소회의 최근 모임에선 여러 대선주자들과 대선캠프 핵심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2월 17일 열린 이 모임에는 동방성장론을 앞세워 사실상 대권도전에 나선 정운찬 전 총리, 이미 대선출마를 선언한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선대위원장을 맡은 박병석 의원,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지지하는 박명광 지구촌나눔운동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중도 보수층이나 충청권에서 반 전 총장 인기는 여전하다. 반기문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영입하면 지지층 일부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영입 경쟁이 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선 반 전 총장을 지지했던 일부 충청권 인사들이 안희정 충남지사와 교감 중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안 지사가 대연정을 언급하고 나선 것도 반 전 총장을 지지했던 이들을 포용하기 위함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반 전 총장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일부 단체는 불출마 선언 이후 오히려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의 한 지지단체 회장은 “불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바로 반 전 총장 사진을 내리고 단체 이름까지 바꿨다. 향후 다른 대선 주자를 지지하자고 회원들끼리 의견을 모으는 중”이라며 “조직을 만들기 위해 엄청 고생을 했다. 이왕 만들어놓은 조직을 이대로 해체할 수는 없고 대선 때 나름의 역할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반 전 총장 대선 불출마 결정을 존중하며 뒤에서 돕겠다는 단체들도 있다. 반 전 총장 지지단체 반딧불이 측은 “반 전 총장이 정치를 중단하긴 했지만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글로벌시민의식을 갖도록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반딧불이와 계속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면서 “반딧불이 주요 임원진도 향후에 반 전 총장께서 하시는 일을 적극 응원하고 함께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반 전 총장을 도왔던 주요 정치인들은 아직 관망 중이다. 영입 제안은 여러 곳에서 받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특정 캠프에 참여한 정치인은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반 전 총장 캠프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미 한번 모시던 주군이 불출마를 선언해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됐는데 다들 함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캠프를 갈아탔는데 또 한번 후보가 불출마 선언을 하거나 경선에서 탈락하면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것 아닌가. 아직 각 당 경선 판세도 예측하기 힘든 만큼 경거망동하기보단 당분간 지켜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번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지자들과 주변 참모들이 입장을 정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반 전 총장은 지난 3월 2일 오랜만에 지지자들과 모임을 가졌다. 불출마 선언 후 거의 한 달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하는 자리였지만 반 전 총장 측은 평소 친분이 있던 몇몇 지역 언론사 관계자들만 현장에 초대했다.
사실상 캠프 해단식과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지만 이날 현장에서는 출정식과 다름없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모임에 참석한 한 지지자는 “반 전 총장이 출마선언도 하지 않았으니 불출마 선언은 있을 수 없다. 법률용어로 원인 무효”라며 불출마 선언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 다른 지지자도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곧 엄청난 민심의 회오리가 일어날 것이다. 국민들이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 철회를 요구하고 여러 당에서 영입하려고 난리가 날 텐데 대선출마를 피하고 싶어도 피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를 주최한 반 전 총장 최측근 임덕규 회장은 “반 전 총장 같은 훌륭한 인재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며 사실상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 철회를 요구했다. 임 회장은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에도 반 전 총장 지지단체들을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 마지막엔 모든 지지자들이 반 전 총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대선 불출마 선언을 철회해 줄 것을 읍소하다시피했다.
이날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 철회를 요구하는 지지자들의 발언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같은 모호한 태도 때문인지 정치권에서는 반 전 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철회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탄핵 심판 결과에 따라 반 전 총장 지지율이 반등하면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반 전 총장은 오는 3월 8일 충북경제포럼 월례 초청강연회에 참석하며 공식 활동도 재개한다.
그러나 반 전 총장 측 관계자는 “반 전 총장이 불출마 철회를 요구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또 한 번 매정하게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조용히 듣고 계셨을 뿐”이라며 “대선 불출마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