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심판 이후 소수의견 공개로…결정적 영향 미친 듯
헌법재판소는 9명의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3명은 국회에서 지명하고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해서 이를 대통령이 임명한다. 나머지 3명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서 임명한다. 국회 몫인 3명의 경우 야당 추천과 여당 추천, 그리고 여야 합의로 지명된다.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가 균등하게 임명권을 분할하고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정부 여당에게 유리한 구조다. 대통령 임명권 3명에 여당 추천 임명권 1명 등 4명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최종선고기일에 참석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관은 임기가 6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며 정권교체가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임명권만 갖고 정부 여당과 야당의 유·불리를 따질 수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퇴임했으며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을 경우를 가정해 보면 상황이 명확해진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내년 봄에 헌법재판소에서 주요 사건의 결정을 내릴 때 9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3명은 새로운 대통령이 아닌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들로 오히려 정부 여당이 불리한 상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보수와 진보, 중도 등 헌법재판관들의 개인적인 성향은 존재하고 이런 부분이 결정문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임명권자가 누구냐에 따른 정치적인 결정이 나올 우려는 크지 않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적이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세간의 관심은 9명의 헌법재판관에게 집중됐다. 우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서기석 재판관과 조용호 재판관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이들 외에도 박한철 전 소장(이명박 대통령 임명)과 안창호 재판관(새누리당 지명) 이진성 재판관(양승태 대법원장 지명), 김창종 재판관(양승태 대법원장 지명) 등 네 명의 헌법재판관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됐다. 반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헌법재판관은 김이수 재판관(민주통합당 지명)과 이정미 재판관(이용훈 대법원장 지명) 등 두 명이었으며 강일원 재판관(여야 합의 지명)이 중도 성향으로 분류됐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뒤 격렬한 촛불시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선 ‘자진 하야’와 ‘국회 탄핵’을 두고 논란이 지속됐다. 국회가 탄핵소추안 표결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를 반대한 이들 가운데에는 이런 헌법재판관의 구성을 우려한 목소리도 많았다.
헌재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이런 구성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과 헌법재판관이 법정에서 자주 충돌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박 전 소장의 퇴임이 임박한 시점부터였다. 박 전 소장이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3월 13일) 이전에 선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한 것. 보수 성향의 박한철 전 소장이 헌재소장이던 상황에선 큰 충돌이 없었지만 선고 시점을 둘러싼 논란으로 충돌이 시작된 뒤 진보 성향의 이정미 재판관이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되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게다가 주심인 강일원 재판관 역시 보수 성향이 아닌 중도 성향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의 포화는 중도 성향의 주심과 진보 성향의 소장 권한대행에 집중됐다. 이를 두고 여전히 8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5명이 보수 성향임을 감안한 충돌이라는 분석까지 나왔을 정도다.
결론은 8명의 헌법재판관이 모두 ‘인용’ 결정을 내린 만장일치 인용 선고였다. 보수 성향이 5명, 진보 성향이 2명, 중도 성향이 1명이라는 성향에 따른 분석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으며 임명권자에 따른 정치적인 영향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심판과 같은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서 재판관의 개인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 결론을 예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법조계의 지적이 그대로 반영된 결론이었다.
어느 정도 탄핵 인용이 예상되는 분위기였지만 전원일치 인용 결정은 다소 의외라는 의견이 많다. 중요 사건에서 헌재에서 만장일치로 결정이 나오는 사례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전교조 법외노조 근거법 등에서도 1명의 소수의견이 있었으며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언론과 사학을 포함하는 것에 대해서도 2명의 소수의견이 나왔다. 국회선진화법에선 5명이 각하 의견을 낸 데 반해 2명이 기각, 2명이 인용 의견을 내놨다. 최근 몇 년 새 가장 격렬했던 사안인 간통죄 위헌 결정에서도 두 명이 합헌 의견을 냈다.
우선 그만큼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명확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헌재의 탄핵 심판과 동시에 진행된 특검의 수사 결과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부터 엄청난 인파가 촛불집회에 몰려나오며 드러난 민심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이 다양한 수단으로 거듭 시간 끌기에만 집중했으며 2월 들어서는 헌법재판관들을 상대로 다소 심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헌재 흔들기에 나선 부분이 만장일치 인용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정치권에선 이번 전원일치 인용 결정을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의 그림자’ 때문이라고 해석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04년까지만 해도 헌재법 36조 3항은 ‘법률의 위헌심판, 권한쟁의심판 및 헌법소원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고만 돼 있었다. 결국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의견을 남기라는 규정은 없었고 이에 따라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결정문에는 헌법재판관의 의견이 담기지 않았다. 이 같은 무기명 결정문에 비난 여론이 뒤따랐다.
결국 국회는 2004년 말 헌법재판소법 36조 3항을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로 개정했고 이에 따라 이번 탄핵 심판에선 소수의견인 기각을 결정한 헌법재판관이 실명으로 의견을 밝혀야만 했다.
법조계에선 법 개정으로 인해 2004년 탄핵 심판 당시보다 헌법재판관들이 더욱 더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압도적인 탄핵 인용 여론 앞에서 헌법재판관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기각 입장을 밝히기가 쉽지 않았을 것. 실제로 ‘최순실 게이트’ 이후 여론은 사법부를 강하게 흔들어 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주요 인사들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담당 판사 신상털기가 이어졌으며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 등 일부 헌법재판관 역시 신상털기와 협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