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리인단 도발적 변론 방식에 헌재 눈 꿈쩍 않고 재판 속도 붙여
대통령 탄핵심판은 지난해 12월 9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소추의결서 정본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같은해 12월 22일부터 3차례 열린 준비절차를 거쳐 올해 1월 3일 첫 변론이 시작되면서 81일 간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파면당한 10일 오전의 헌법재판소 전경. 멀리 청와대의 모습도 보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준비 기일부터 청와대 당황케한 헌재
“세월호 참사가 2년 이상 지났지만 대부분 국민이 자신의 행적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청구인(박근혜 대통령) 역시 그 기억이 남다를 거라 봅니다.”
탄핵심판이 시작되고 재판부가 박근혜 대통령 측에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다. 지난해 12월 22일 열린 탄핵심판 첫 준비기일에서 이진성 재판관이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을 시간대별로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앞서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대응에 대한 논란은 탄핵심판에서 주요 쟁점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박 대통령의 세월호 행적은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서에 가까스로 들어간 탄핵 사유였을 뿐만 아니라, 여권과 야권 일부에서도 “억지로 넣었다”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헌재의 질문에 법정에선 상당한 긴장감이 흘렀다. 청와대 역시 ‘헌재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 대통령 측은 “완벽한 대답을 내놓겠다”며 시간을 끌다가 3주 뒤인 1월 10일 대통령의 당일 시간대별 행적을 밝혔다. 그러나 답변서에는 각종 보고 시각만 나열돼 있는 등 대체로 기존 해명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판부는 보고 당사자와 통화내역 등 추가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대통령 대리인단은 여기서도 시간을 끌다가 끝내 추가자료는 없다고 밝혔다.
# 나타나지 않는 증인들…중요 진술 나오기도
탄핵심판은 지난 1월 본격변론을 개시했다. 그러나 정작 재판은 핵심 증인들이 출석하지 않아 수차례 파행하기도 했다. 지난 1월 5일 열린 2차 변론기일엔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이영선·윤전추 행정관이 나오기로 돼 있었지만,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건 윤 행정관뿐이었다.
특히 이 비서관·안 비서관의 경우 장기간 집을 비우며 헌재의 증인출석 요구서 자체를 받지 않았다. 이들이 요구서를 수령하지 않아 출석 의무가 없어, 헌재는 ‘강제 구인’ 카드도 꺼내지 못했다. 1월 10일 3차 변론기일에 소환된 ‘비선 실세’ 최순실·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역시 모두 불출석 사유서를 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재판 시작 후 일주일 동안 증인 7명 중 6명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헌재는 지난 1월 16일, 예정에 없던 ‘특별기일’을 잡았다. 주 3회 변론기일을 열어야 했지만 일정 지연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재판부의 의지 표명이었다. 이날부터 최순실·안종범 전 수석·정호성 전 비서관·광고 감독 차은택·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등 사건의 핵심 인물들이 증인석에 앉았다.
이 과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한 최 씨와 달리 안 전 수석과 정 전 비서관 등은 비교적 솔직하게 국정농단 의혹의 전모를 밝혔다. 안 전 수석은 검찰과 특검 수사에도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는데, 탄핵 심판에서도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과 삼성 승계 등에 전방위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그는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미리 SK에 최태원 회장 사면을 알려주라고 했다”며 박 대통령이 최태원 회장 사면 문제를 세세하게 챙겼다는 내용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이날 법조계에선 “대통령의 사면관과 관련된 언급이 탄핵 심판에 주요 증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월 19일 7차 변론에 참석한 정호성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차명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11월 청와대는 대포폰 의혹 제기에 대해 근거 없는 의혹이라며 일축했지만 이날 진술로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2달 만에 다시 논란이 재점화됐다. 특검은 이 증언을 토대로 대통령 대포폰 사용 내역 확보의 실마리를 잡기도 했다.
지난 1월 16일 오후 안종범 전 수석이 대통령 탄핵 심판과 관련, 헌법재판소에 증인 출석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퇴임 박한철 헌재소장 ‘작심발언’
초기 더디게 진행되던 재판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1월 말 박한철 전 헌재소장의 퇴임 이전 결론을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측은 지난 1월 23일 8차 변론기일에서 증인 39명을 무더기 추가 신청했다. 박 전 소장 퇴임 전 선고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박 전 소장은 자신의 마지막 재판인 지난 1월 25일 9차 변론기일 개정과 동시에 굳은 표정으로 ‘작심 발언’을 내놨다. 그는 “헌재 구성에 더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늦어도 3월 13일까지는 최종 결정이 선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결론 기한을 못 박은 그의 말은 대통령 측은 물론 차기 대권 일정에 돌입한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불렀다.
헌재 안팎과 법조계의 말을 종합하면 동료 재판관들은 앞서의 박 전 소장의 발언 반대했다고 한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사건이 정치적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박 전 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대통령 측은 곧바로 대리인단 총사퇴를 시사하며 극렬히 반발했다. 이후 대통령 대리인단은 심판 내내 “끝낼 시점을 미리 정해두고 재판한다” “헌재가 국회와 내통했다”는 ‘막말’을 던졌다.
# 대리인단 ‘도발공세’…오히려 단호해진 헌재
박한철 전 소장의 ‘3월 13일 이전 선고’ 발언이 나온 지난 1월 25일 저녁, 박 대통령의 ‘깜짝 인터뷰’가 나왔다. 박 대통령이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의 ‘정규재TV’를 통해 자신의 탄핵사유와 형사사건 혐의를 일절 부인하는 방송 인터뷰를 내보낸 것. 인터뷰 내용은 기존 입장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본 지지자들의 세는 더욱 확산됐다. ‘태극기집회’ 인원은 크게 불어났고, 공개 석상에서 ‘탄핵 반대’를 외치는 정치인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고성준 기자
분위기는 법정으로 이어졌다. 이후 대통령 대리인단의 ‘공세’가 시작된 것. 박 전 소장 퇴임 후 2월부터 재판장을 이어받은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의 말을 수시로 끊는가 하면 “(재판부가) 신속을 강조하다가 세계 사법 역사상 비웃음을 살 재판으로 남을까 두렵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권한대행은 대통령 측 대리인단을 강하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측의 ‘도발적’ 변론 방식이 지속되자 헌재가 ‘태세전환’에 나섰다. 지난 2월 9일 열린 12차 변론기일을 시작하는 이정미 권한대행의 얼굴 분위기가 변했다. 양 눈썹 끝이 치켜올라가고, 입은 꽉 다문 모습이었다.
이 권한대행은 이날 대통령 측 대리인이 증인을 상대로 중복 질문을 하거나, 불필요한 질문을 할 때마다 “신문이 비효율적”이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강일원 재판관 역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왜 수사기록을 다 확인하느냐.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후 재판의 진행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이 권한대행은 지난 2월 14일 13차 변론기일에서 불출석한 대통령 측 증인을 직권 취소하고 추가 증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2월 16일 14차 변론기일엔 대통령 측의 강한 반발에도 2월 24일 최종변론을 열겠다고 쐐기를 박았다. 불과 일주일 만에 결론까지 다가섰다.
이후 대통령 측은 시간부족을 이유로 최종변론을 3월 2∼3일로 미뤄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연기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2월 27일’로 못 박고 대통령 출석 여부도 26일까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특히 대통령이 최종변론 이후 출석 의사를 밝혀도 새로 기일을 잡지 않을 거라고 미리 선을 그었다. 끝내 박 대통령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최종선고기일에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월 27일 열린 최종변론은 6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국회 측은 1시간 14분 간 대통령의 탄핵 필요성을 강조했고, 대통령 측은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필두로 15명의 변호사가 5시간 동안 마라톤 변론으로 탄핵사유를 부인하거나 헌재 ‘8인 체제’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헌재는 최종변론 다음 날부터 결론 도출을 위한 재판관 평의에 들어갔고, 3월 10일 오전 11시부터 박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 선고가 시작됐다. 23분여 동안 이어진 선고에서 이 권한대행은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고 만장일치 인용을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돼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게 됐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