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만으로는 탄핵의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충의견까지 첨부하며 세월호 7시간의 부재했던 리더십을 적시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긴박하게 돌아가야 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올림머리 하는 것이 중요했던 유아적 리더에 대한 안타까움과 질책이었을 것이다.
“최서원의 국정개입을 철저히 숨겼고,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의혹제기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정미 권한대행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헌법의 가치를 무너뜨린 불통의 리더를 비판하는 요지는 분명했다. 대통령은 권력으로 모든 것을 막으려 했고, 억지로 막는 과정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먼 희생양을 만들었다. 그 불통의 대통령은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그 스타일을 바꾸지 못했다.
“피청구인은 대국민담화에서 진상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검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수호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명확한 지적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대변했다는 변호사들을 탄핵의 1등공신이라고까지 할까. 그들의 논리와 행동은 국민을, 재판관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통대통령 한 사람을 위한 수준 낮은 공연처럼 보였다. 불통 대통령이 스스로 판 함정이고, 덫이었다.
불통의 리더는 아랫사람을 소모품으로 생각할 뿐 자기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 주변엔 온통 그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아부꾼일 뿐이다. 나는 리더가 주변 사람들의 아부에 갇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바로 누구를 모아 어떻게 쓰는가가 리더의 능력이고 자질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유비처럼 부하를 아끼면 부하는 리더를 위해 조자룡처럼, 공명처럼, 관우처럼 자기 자질을 백분 발휘한다. 그러나 리더가 부하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면 부하는 눈치만 보다가 자기 살길을 찾아간다.
그녀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들었다지만 그렇게 무책임한 대통령을 보는 국민들의 함성이 “이게 나라냐”고 터져 나오며 마침내 탄핵으로 “이게 나라”임을 선언한 것이다. 촛불과 촛불들이 모여 큰 불을 이룬 것이다.
21세기, 시위문화를 바꾸고, 역사를 바꾼 것은 바로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 촛불들이었다. 촛불이 아름다웠던 것은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일군 명예혁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장에 나가든 나가지 못했든 우리는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단호한 뜻을 알렸던 촛불들이었다. 그 촛불의 힘이 소통의 리더를 뽑는 에너지가 되리라 믿는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