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측의 얘기는 또 달랐다. 권력을 잡자 다가와 제일 싹싹하게 잘 한 사람이 삼성 회장이라고 했다. 퇴임 전날까지도 대통령을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면서 아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하루 8시간씩 30일 동안 열린 대통령과 재벌회장의 뇌물죄 재판을 나는 빠짐없이 다 봤다. 우연히 전직 대통령가족의 자문에 응하는 기회에 구속된 대통령의 심정도 일부 알 수 있었다.
왕의 지위에서 감옥으로 떨어진 대통령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구치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법정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독방에 갇혀있는 대통령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요구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권했다. 황제들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지혜를 얻기를 기대했다. 얼마 후 꾸중이 전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역사공부나 하라는 것이냐면서 언짢아하신다는 얘기였다.
권력이 없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갔다. 대통령 가족이 어떻게 법정진술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법정에 선 예수의 한마디는 영원한 복음이 됐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법정발언도 안중근 의사의 법정진술도 모두 다 역사가 됐다. 법정에서 대통령의 말은 역사로 변할 게 틀림없었다.
80년대 법무장교 시절 군법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조사받는 걸 본 적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작성된 조서를 보고 또 보고 오탈자까지 고쳤다. 그리고 조서의 끝에 자필로 최후진술을 덧붙였다. 그 내용은 앞으로 세월이 흘러 민주화 시대가 도래하면 조서에 적힌 말들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될 것이라는 문장이었다. 단정하게 적힌 쓴 글들과 오탈자까지 고친 흔적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구속된 대통령 측에 의미 있는 법정진술을 남겨야 한다고 했다. 당황하고 주춤거리던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 주눅 들었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내면에 강인한 본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돈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돈과 권력의 영합 뒤에서 째깍거리던 시한폭탄이 터지면 대책이 막연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돈 문제로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파면되고 돈 문제로 구속됐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은 대를 이어 법정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해 어떤 진술을 할지 궁금하다. 불행한 일이지만 대통령의 이번 사건을 그래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제 이 나라는 머슴인 대통령과 권력자에게 언제든지 합법성을 묻고 감시 통제하는 법치국가로 가는 과정이라고.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