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선택 속에서도 ‘회장님엔 충성’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2월 2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삼성의 2인자, 3인자로 불리는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 삼성의 핵심 인물들을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이 부회장과 삼성 핵심 임원들이 공모해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것. 하지만 삼성의 임원들은 이 부회장이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심리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판에는 최 전 부회장과 장 전 사장도 출석했다. 삼성 측 변호인은 공판에서 “장 전 사장은 이 부회장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며 “장 전 사장이 이 부회장을 만나는 건 1년에 2~3회 정도이며 일반적 의사결정은 최 부회장이 내리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즉 삼성의 기금 출연은 최 전 부회장의 지시로 이뤄졌고 이 부회장은 개입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2002년 삼성이 불법 대선자금 조성 의혹을 받았을 당시 2인자였던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이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주장해 본인만 처벌 받았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믿은 사람은 적었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까지 돼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룹 2인자가 모든 책임을 지려고 애쓰는 상황은 비슷하다”고 전했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SK그룹의 2인자로 알려진 김창근 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면청탁 의혹을 받고 있다. 김 전 의장은 2015년 7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독대했고, 한 달 뒤인 8월 15일 최 회장은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했다. SK는 같은 해 11월 미르재단에 68억 원, 2016년 2~4월 K스포츠재단에 43억 원을 출연했다.
최 회장이 출소하기 직전, 김 전 의장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게 “최태원 회장을 사면시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SK의 사면청탁 여부와 관계없이 최 회장에 대한 김 전 의장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김 전 의장은 2012년 12월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으면서 당시 수감 중이던 최 회장을 대신해 SK그룹을 대표했고 최 회장 출소 이후에도 그룹의 2인자 자리를 지켜왔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지난 3월 16일 김 전 의장, 김영태 커뮤니케이션위원장(부회장), 이형희 SK브로드밴드 대표, 3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같은 달 19일에는 최 회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SK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검찰이 누구를 어떤 이유로 수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아 기금 출연 등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면서도 “김 전 의장은 재단 출연에 대한 책임자로 수사를 받는 것보다는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한 것 때문에 수사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전했다.
고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의 발인식에 참석한 황각규 롯데그룹 경영혁신실장.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하지만 황 사장은 경영에 매진할 수만은 없는 환경에 있다. 지난해 10월 황 사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소진세 롯데그룹 사회공헌위원장(사장)과 함께 횡령 및 배임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특히 황 사장은 신 회장을 대신해 자동입출금기(ATM) 사업 추진 과정에서 부당하게 계열사 지원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27일 롯데그룹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영환 전 롯데피에스넷 대표는 “황각규 사장이 ‘롯데기공을 도와주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신 회장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증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황 사장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최순실 게이트에서만큼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다. 기금 출연의 책임을 고 이인원 전 부회장에게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해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K스포츠재단에 대한 70억 원 추가 지원 결정은 이인원 전 부회장이 내린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CJ그룹도 이재현 회장의 사면을 대가로 기금을 출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SK를 우선적으로 수사하고 있어 아직까지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소환하지 않았다. 검찰이 소환한 CJ 사람은 지난 2월 최순실 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조영석 CJ 부사장 정도다.
CJ그룹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채욱 CJ 부회장, 김철하 CJ제일제당 부회장이며 조 부사장은 2인자와는 거리가 멀다. CJ 관계자는 “대관 담당인 조 부사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기금 출연 요청을 처리해 법원에 출석한 것이고 회사 내 위상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 관계자는 “장충기 전 사장, 황각규 사장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 대관담당 임원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재현 회장 복귀 후 인사에서 조 부사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각 그룹의 2인자들은 총수 부재 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사건이 터지면 검찰에 소환되는 등 그룹을 위해 노력하지만 아름다운 퇴진을 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최지성 전 부회장과 장충기 전 사장은 미래전략실이 해체되면서 불명예 사퇴했다. 김창근 전 의장도 지난해 말 세대교체 차원에서 2선으로 물러나 현재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인원 전 부회장은 검찰 수사의 압박이 거세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럼에도 이 전 부회장은 유서에서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밝힐 만큼 끝까지 오너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기업 임원은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속된 말로 ‘사내대장부’라는 근성을 갖고 있으며 재직 시 오너에게 무한 신뢰를 받고 권위를 누린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며 “설사 나중에 잘못된다 해도 대장부답게 본인이 다 책임지고 주군 같은 오너에 흠집이 가지 않게 하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