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로 간 보따리에 ‘작은 청와대’ 초석 있나
▲ 노 전 대통령 ‘청와대 자료 유출설’과 관련해 한나라당에서는 합법성 여부 등을 놓고 갖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 ||
정치권 관계자들은 양측의 ‘진실게임’이 신·구 정권 간의 감정싸움을 넘어 ‘정보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이 퇴임 전부터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를 구상해 왔다는 소문이 정치권 주변에서 나돌았고 이명박 대통령과 여권 또한 총체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구 정권을 겨냥한 고강도 사정 플랜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다는 추측이 정가에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와대 자료 유출’ 공방전을 둘러싼 신·구 권력 간의 치열한 진실게임과 여기에 맞물린 피 말리는 ‘정보전쟁’ 속으로 들어가 봤다.
‘청와대 자료 유출’ 논란의 핵심 쟁점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 자료를 가져간 행위의 합법성 여부, 구체적인 자료의 내용, 중요 자료들의 유출 가능성, 노 전 대통령 측이 구상하고 있다는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의 실체, 의혹 제기 시점을 둘러싼 정치적 의도 여부 등이다.
합법성 여부와 관련해서는 여권과 노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이 재임시 생산한 대통령기록물에 대하여 열람하려는 경우에는 열람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등 이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 18조 규정을 근거로 “현재 국가기록원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기록들을 한 부 복사해 봉하마을에 가져온 것일 뿐”이라며 “현 정권의 인수위 시절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여권 관계자들은 “기록물법 18조는 국가기록원이 편의를 제공하는 규정이지 전임 대통령이 자료를 복사해서 가져갈 수 있다는 법 조항은 없다”며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국가 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라고 압박하고 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16일 “나라의 중추신경에 해당하는 청와대의 모든 자료를 전직 대통령이 자기 숙소로 다 가져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고 권영세 사무총장도 “노 전 대통령이 가져간 자료는 100% 반환되어야 하며 필요하면 검찰조사도 진행돼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출된 자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놓고도 양측의 시각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특히 유출 자료의 기밀성 여부가 이번 사건이 진실게임 공방전을 넘어 자칫 신·구 권력 간의 정보전쟁으로 비화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아전인수식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자료 내용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들은 “봉하마을로 가져간 214만 건의 청와대 자료 중에는 언론인 750여 명을 포함한 민간인 35만 명과 공직자 5만 명 등 총 40만 명의 인사파일이 포함된 것으로 안다”며 “총리와 장·차관 등 최고위직 인사를 포함한 정부직 공무원 1만 5000여 명에 대한 2만 3000여 건의 인사검증 보고서(존안 파일)와 고위 공무원 4200여 명에 대한 최신 인물 데이터베이스도 유출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 부처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작성한 주요 정책 문서 2만 5000여 건과 참여정부에서 개최된 539회의 국무회의 및 차관회의 관련 자료 1만여 건, 청와대와 외부기관 간의 전자결재 공문 5만 7000여 건도 유출된 것으로 안다”며 “이 같은 인사 자료들이 유출되는 바람에 초기 조각 때 어려움을 겪었다”는 푸념까지 늘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측 김경수 비서관은 “청와대 내부전산시스템인 ‘e지원(知園)’ 자료엔 인사검증과 같은 민정기록은 일절 없고, 여권에서 주장하는 35만 명의 신상자료라는 것도 청와대 국정브리핑을 발송하기 위한 e-메일 리스트에 불과하다”고 전제한 뒤 “청와대 측에 이 같은 사정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협의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는데 왜 갑자기 논란이 불거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처럼 유출된 자료 내용과 관련해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 측이 가져간 자료 중에 폭발력 있는 ‘극비 파일’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란 조심스런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 18일 기자와 만난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도 퇴임하는 정권이 새 정권의 정치보복에 대비해 자기방어 내지는 반격 차원에서 극비 파일을 암암리에 빼돌렸던 사례가 없지 않았다”며 “노무현 정권 관계자들 또한 참여정부 시절 축적한 각종 ‘X 파일’을 자기방어 등의 차원에서 은밀히 갖고 나왔을 개연성이 높다”고 전했다.
‘X 파일’의 내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참여정부 시절 불거졌던 대형 게이트 사건을 비롯해 현 여권 인사들이 연루된 의혹을 받았던 각종 비리 파일들이 망라돼 있을 것이고 ‘쇠고기 협상’과 맞물린 한미 FTA 문제 등 참여정부와 현 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주요 정책과 관련된 비공개 파일들도 다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답했다.
▲ 이명박 대통령. | ||
노 전 대통령 측이 가져간 자료들의 외부 유출 가능성을 둘러싼 공방전도 치열하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인터넷망으로 현재 청와대 시스템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복사본을 봉하마을 내에서 노 전 대통령이 참고하는 것이니 해킹이나 외부 유출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유출된 자료에는 국가 주요 인사 및 중요 기밀들이 포함돼 있어 외국과 국내외 기업이 자료 확보를 위해 온·오프 라인으로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며 외부 유출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정부는 국가기록원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측에 e지원 가동을 중단하고 자료를 반환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으나 노 전 대통령 측이 끝내 응하지 않을 경우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어서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여권에서 노 전 대통령 측이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의 실체도 ‘자료 유출’ 공방전을 심화시키는 핵뇌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친노그룹이 2006년 말부터 TF팀을 구성해 봉하마을을 축소판 청와대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해 왔다는 게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의 골자다.
조만간 공식 개설을 앞두고 있는 정치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과 친노 핵심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추진하고 있는 재단법인 ‘봉하’ 설립 계획도 이러한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라는 게 여권 인사들의 관측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얼마 전 모 보수언론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측의 자료 유출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J 전 비서관 등 친노그룹 비서관급 3명이고 ‘자료 유출 로드맵’ 문건도 확보했다”고 주장해 자료 유출이 ‘작은 청와대’ 플랜과 일정 부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여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방대한 청와대 자료 유출과 여론정치 시동 움직임 등 노 전 대통령과 친노 진영의 일련의 정치행보는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이 ‘쇠고기 정국’을 호재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 경우 더 큰 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측은 여권에서 주장하는 ‘작은 청와대’ 프로젝트에 대해 “일부 보수 언론이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청와대 관계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게재해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청와대 측이 공식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도 대응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료 유출 의혹’ 제기 시점을 둘러싼 정치적 의도 여부는 자칫 신·구 권력 간에 생사를 건 대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친노 진영은 ‘쇠고기 정국’ 등으로 여권이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한 시점에서 ‘자료 유출’ 의혹이 불거진 배경에 강한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보수 언론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들을 쟁점화시켜 ‘자료 유출’ 공방전에 불을 지피고 있고 일부 청와대·정부 관계자들은 현 정부의 초기 인사 실패 책임을 노 전 대통령 측에 전가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 사건을 ‘국기 문란 행위’로 몰아가면서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료 유출 의혹을 둘러싼 여권의 전 방위적 압박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측은 현 정권이 ‘정국 반전용’ 내지는 본격적인 ‘정치 탄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친노계인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여권이 근거도 없이 자료 유출 의혹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참여정부와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 위기정국을 돌파하고자 하는 얄팍한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라며 “‘쇠고기 파동’ 등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고 노 전 대통령의 인기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도 여권이 무리수를 두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노그룹의 또 다른 관계자는 “여권이 새 정부 출범 이후 사정라인을 풀가동해 공기업 개혁과 비리 척결 등을 명분으로 참여정부와 친노 인사들을 겨냥한 강도 높은 사정 칼날을 휘둘러 온 게 사실”이라며 “고강도 사정 전략이 여의치 않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흠집내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라고 ‘정치 탄압’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처럼 ‘청와대 자료 유출’ 논란을 둘러싼 여권과 노 전 대통령 측의 공방전이 가열되고 있어 자칫 이 사건이 신·구 정권 간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쇠고기 정국’을 털고 정국 대반전을 꾀하고 있는 현 정부와 친노그룹의 중장기 생존 플랜과 맞물려 본격적인 ‘여론정치’에 시동을 걸고 있는 노 전 대통령 측의 상반된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양측 진영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전운이 감돌고 있는 형국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