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 세계사에 유례 없는 ‘모두를 위한’ 예방의학서
<동의보감>의 갈피, 갈피에는 허준의 보이지 않는 땀과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연합뉴스
<동의보감>은 1613년(광해군 5년) 간행된 동양 의학사상과 지식, 치료법에 대한 기념비적인 의서다. 선조의 왕명에 따라 어의였던 허준이 조선과 중국에서 유통되던 의학서적과 문헌을 참고하고 임상의학적인 체험과 지식을 더해 1610년 완성했다.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찍어낸 최초 간행본은 ▲목록 ▲내과질환에 관한 내경편(內景篇) ▲외과질환에 관한 외형편(外形篇) ▲유행병·급성병 등에 관한 잡병편(雜病篇) ▲약재·약물에 관한 탕액편(湯液篇) ▲침과 뜸에 관한 침구편(鍼灸篇) 등 5개 분야에 걸쳐 총 25권(25책 108조)으로 구성되었다. 병의 이론, 처방, 출전(出典)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한의학의 백과사전’으도 불리며, 의학적 효용성과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지난 400여 년 동안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동의보감>은 ‘양생’(養生)의 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진 의서이다. 병의 치료법뿐만 아니라 병을 예방하는 지혜를 함께 담았다.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하게 생활하는 게 더 유익함을 강조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예방의학 서적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의보감> 편찬 작업은 수많은 백성들이 부상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임진왜란 와중에 시작됐다. 한자로 쓰인 각종 의서는 한글만 겨우 깨우친 일반 백성에게 무용지물이었고, 처방에 쓰이는 약재들도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고가품이라 ‘그림의 떡’에 가까웠다. <동의보감>에는 백성의 처지를 배려하는 애민정신이 함께 담겨 있었다. 책의 ‘탕액편’에 토종 약재를 소개하고 한자 이름과 한글 이름을 함께 기록해, 일반 백성도 주변의 약초로 간단히 병증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왕조 시대에 백성의 건강을 위해 국가가 나선 이 같은 편찬 사업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유네스코가 2009년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동의보감>을 등재하면서 “19세기까지 전례가 없던 개념인, 국가에 의한 공공의료의 이상을 담아낸 것”으로 높이 평가한 배경이기도 하다.
1613년 간행된 허준의 <동의보감>은 병의 이론, 처방, 출전 등을 25권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의학 백과사전이다. 연합뉴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한 시기는 1610년(광해 2년). 선조의 명을 받아 편찬작업에 나선 지 14년 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당시 몇 살이었을까. 허준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 왕실 의원들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명부인 <내의선생안>과 <태의원선생안>에는 1537년생으로 적혀 있다. <내의선생안> 기록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고희(古稀·예로부터 드문 나이)를 훌쩍 넘긴 나이, 만 73세에 <동의보감>을 완성한 셈이다. 환갑을 맞는 이가 드물던 당시 사회상을 감안하면 고령을 극복한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동의보감> 편찬은 1596년(선조 29년)에 시작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허준을 비롯해 명성 높은 내의원 의원들과 민간 의원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1598)으로 편찬 작업을 한동안 멈춰야 했고, 이후 허준이 의서 편찬의 중임을 다시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허준은 길고 긴 ‘의서와의 씨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의로서 공무를 보면서 의학지식과 치료법을 집대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선조가 승하하자 허준은 칠순의 나이에 그 책임을 지고 압록강 인근 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 같은 최악의 여건도 최고의 의서를 완성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허준은 스스로를 독려하며 의서 편찬에 더욱 매달렸다. 그 결과 귀양에서 풀려난 이듬해에 마침내 <동의보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광해 2년, 1610년 8월 6일)의 관련 기록을 한번 보자.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동의보감>의 갈피, 갈피에는 허준의 보이지 않는 땀과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오래된 책이 의학서 그 이상의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