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포된 조이티 드로리 | ||
생각만 해도 불쾌한 일이 최근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나 논란이 되고 있다. 그것도 바로 세계 최대 투자은행이라고 자부하는 천하의 골드만삭스가 한 여성에 의해 보기 좋게 농락당한 것.
모두 세 명의 임원진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펼치다 체포된 여성의 이름은 조이티 드로리(35). 골드만삭스에서 개인 비서로 근무하던 2년 동안 무려 4백40만파운드(약 90억원)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그는 지난 4월20일 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으며, 오는 6월 최고 10년형까지 선고받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건을 상관들의 부유한 생활을 모방하고 흉내 내다가 도둑질에까지 이르게 된 한 여비서의 방탕한 생활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 많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은행이 어떻게 해서 이처럼 허술하게 뚫렸느냐하는 데 있을 것이다.
드로리가 처음 골드만삭스 영국 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것은 지난 1998년 5월. 처음에는 임시직이었지만 회사 중역이자 은행가인 제니퍼 모세스의 개인 비서로 발탁되면서부터 정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점차 모세스의 신임을 얻게 된 그는 그후 모세스의 남편이자 역시 골드만삭스의 임원이었던 론 벨러를 위해서도 일하게 됐다.
부부의 개인 비서로서 이들과 관련된 잡다한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게 된 그는 종종 자신의 상사 대신 수표에 서명을 한다거나 청구서를 지불하는 등 공적인 업무 외에도 자녀들을 돌보거나 쇼핑, 파티 기획은 물론이요, 심지어 집안 인테리어에까지 신경을 쓰는 등 각별한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그만큼 드로리를 비서 이상의 가까운 관계로 인정했던 모세스-벨러 부부는 한 번은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니 4만파운드(8천2백만원)를 대부해달라”는 그의 부탁에 “이자는 필요 없다”며 흔쾌히 거액을 빌려주기도 했다. 후에 드로리는 모세스의 계좌에서 불법으로 이체한 금액 중 일부로 이 돈을 전부 갚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는 끝내 자신들의 계좌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지난 2001년 회사를 그만뒀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모세스-벨러 부부의 비서로 근무하던 기간 동안 드로리는 부부의 이름을 빌려 불법으로 자신의 계좌에 약 1백만파운드(약 20억원)를 이체하는 대범한 사기 행각을 보여 주었다.
당시 “나와 함께 다른 회사로 옮기자”는 벨러의 제안을 거절한 채 골드만삭스에 남았던 드로리는 이어 텔레콤 부문의 최고 은행가이자 성공적인 투자가로 정평이 나있던 에드워드 스콧 미드(49)를 상사로 모시게 됐다.
도둑질은 마약과도 같다고 했던가. 이번에도 역시 미드의 아내와 다섯 아이까지 함께 돌보는 등 개인적인 업무까지 도맡게 된 드로리는 점차 상사의 신임을 얻으면서 ‘부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특히 미드의 모든 계좌 거래내역을 총괄 담당하고 있던 그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그의 수법은 간단했다. 수많은 은행 거래내역 중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내역만 누락시킨 채 보고를 올렸으며, 상사의 서명을 위조해 여러 군데 은행에서 불법으로 자신의 계좌로 자금을 이체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반드시 잡히는 법.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한 후 키프로스섬으로 옮겨 새 삶을 찾으려고 했던 그의 야무진 꿈은 결국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문제는 욕심이 과한 나머지 ‘마지막 한탕’이 너무 컸다는 데 있었다.
지난 2002년 1월 늘 하던 대로 상사 미드의 사인을 위조한 위임증서로 무려 2백25만파운드(약 46억원)를 한꺼번에 빼낸 드로리는 당시 은행의 클라이언트 애널리스트마저 감쪽같이 속였다. 자신의 상사가 뉴욕에 집을 한 채 구입하려고 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며 둘러댄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키프로스 은행 계좌로 거액의 금액을 이체했다. 애널리스트는 “워낙 그와 평소에 많은 업무를 같이 해왔기 때문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미드와 같은 재벌들은 세계 곳곳에 집을 구입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또한 ‘샤호(Schahhou)’라는 수취인의 이름에 대해서도 드로리가 “뉴욕의 집주인 이름”이라고 둘러댔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점차 키프로스로 거처를 옮길 준비로 들떠 있던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던 것은 그해 5월. 당시 우연히 자신의 계좌를 살피던 미드가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즉각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이로써 미드로부터 총 3백30만파운드(약 68억원)를 횡령해온 그는 수표 위조와 사기 계좌이체라는 명목 등으로 2년여의 사기 행각에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처음 자신의 혐의를 극구 부인했던 그는 “모두 일종의 보상으로 지불된 것이다. 상사들은 내가 자신들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서명을 도용해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제공해준 ‘무제한적인’ 서비스의 대가로 나에게 계좌를 열어 두었던 것이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드의 경우에는 여변호사와의 불륜을 눈감아주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이에 “모두 터무니 없는 모함”이라고 반박하고 있는 미드는 “여비서에게 내 계좌를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면 굳이 서명을 위조할 필요가 뭐가 있었겠느냐”며 항변했다.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믿었던 측근에게 당한 사람들은 “내 생전에 이렇게 배신감을 느껴 본 일은 처음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며 씁쓸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