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 ‘효’를 키워드로 살펴본 영웅의 일기
<난중일기>는 빼어난 전쟁 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사료다. 연합뉴스
<난중일기>(국보 제76호)는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친필 일기이다. 모두 7권(205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임진년(1592) 전라좌수사로서 왜적의 침공을 대비하던 시절부터 무술년(1598) 11월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사실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왜란 기간 중에 쓴 일기를 ‘임진일기’ ‘계사일기’ 식으로 해마다 표제를 달리해 구분해 놨을 뿐이다. 장군의 일기에 ‘난중일기’란 이름이 붙은 것은 왜란 발발 후 200년이 지난 정조 때였다. 장군을 영의정으로 ‘가증’(위계를 더 높임)하면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토록 했는데, 이때 장군의 일기들을 묶어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난중일기>는 전쟁 중 군 사령관이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록물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열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중요성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3년 <난중일기>는 역사적 기록이자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기록유산’ 사이트에서는 <난중일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록물이지만 매일의 자세한 전황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견해와 소회, 기후에 대한 관찰, 전장의 지형적 특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의 생활상도 담겨 있다. 문체는 간결하고 유려하다. 이 전쟁 일기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현대 서구 국가들이 ‘7년 전쟁’의 해전을 연구하는 데 널리 활용되고 있다.”
국보 제76호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사진제공=문화재청
하지만 <난중일기>는 빼어난 전쟁 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사료이기도 하다. 장군의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무엇일까. 아마도 전투와 관련된 단어들을 제외한다면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효성이 남달랐던 장군은 치열한 전장에서도 며칠만 어머니(초계 변씨)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면 마음을 내내 졸였다. 수시로 편지를 보내거나 가솔과 친인척을 보내 어머니께 문후를 드렸다. 전란 중 한동안 여수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가까운 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평안하신지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수군을 이끌며 드넓은 바다를 오가는 처지인지라 대부분은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래서일까, 일기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임진년 1월 1일)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계사년 5월 4일)
“하루 걸릴 탐후선(정찰과 보급 등에 쓰인 배)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으니 어머니 안부를 알 수가 없다. 속이 타고 무척 걱정된다.”(을미년 5월 13일)
“저물녘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이질이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을미년 6월 9일)
병신년(1596년) 8월 12일 일기에는 장군이 어렵사리 배를 본영 가까이에 대고 모처럼 어머니를 뵙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추상 같은 장군도 팔순 노모 앞에선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열 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흰 머리카락이 에부수수하신데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셨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로하며 기쁘게 해 드렸다.”
장군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임종을 하지 못했다.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던 당시 비보를 전해들은 장군은 홀로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급히 달려가 사흘 후에야 어머니 영구(관) 앞에 선 심정을 장군은 일기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정유년 4월 16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던 그해 생신날(5월 4일),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리던’ 장군은 다음날에도 가슴에 사무친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땅의 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 어머니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지내니, 무슨 죄로 이런 보답을 받는고!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구나.”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던 전장에서도 늘 어머니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군. 나라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한결같았던 그의 단심은 400여 년의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