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분도 없는데 속옷 내려…성적 욕구 없어도 추행”
지난 10일 의정부지방법원 1호 법정에서 오전 11시부터 재판이 예정됐지만 재판은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한 검찰과 재판부의 배심원 선정이 오랜 시간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배심원 후보자들은 법정을 오가며 분주한 모습을 연출했다. 배심원 선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법정 밖에서 줄을 서 있는가 하면 배심원에 선정되지 못한 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법원을 떠났다.
재판이 시작되고 불구속 상태인 이 아무개 씨(24)와 노 아무개 씨(20), 하 아무개 씨(23)가 사복 복장으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이들은 건국대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로 같은 과에 입학한 A 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3월 신입생 MT에 참여한 피고인들은 술에 취해 먼저 자고 있던 A 씨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항거불능 상태였던 A 씨의 상의를 올려 배 부위에 치약을 짜서 발랐고, 하의와 하의 속옷도 성기가 보이게 내려 음모 부위에 짜서 비벼 발랐다. 하 씨는 다른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 동영상 촬영까지 했다.
지난 10일 의정부지방법원 1호 법정에서 동성간 성추행을 가리는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검찰과 변호인 측은 A 씨에게 피해 상황에 대해 신문했다. A 씨는 “술에 너무 취해 이들이 범행을 하는 동안 인지하지 못했고 새벽에 잠깐 일어났을 때 다른 누군가가 얼굴에 바른 치약만을 보고 씻었다”며 “아침에 제대로 깨서야 음모 부분에 치약이 발라졌다는 걸 알게 됐지만 샤워시설을 찾지 못해 오후에 집에 와서야 씻었다. 그땐 이미 빨갛게 부어 있었고 따가웠다”고 말했다.
A 씨는 같은 과 학생을 통해 촬영된 동영상까지 확인했다.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았고 정신장애 정도가 심해 입원을 권유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고등학교 시절 활발한 성격이었고 3학년 때는 전체 회장을 하면서 리더십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A 씨는 “사건을 당한 이후 걸어가다 충동적으로 차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길거리에서 보는 사람마다 다 나를 칼로 찌를 것 같아 집밖으로 쉽게 나가지 못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돼 갔다”면서 “피고인들은 나와 달리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나가지 못하는 학교도 문제없이 다니고 있었다. 재판 결과에 따라 내가 학교생활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가해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불안하고 겁이 나 이대로 학교를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또 A 씨는 “피고인들은 MT 가기 이전에는 거의 본 적이 없는 사이라 친구라고 할 수도 없다. 대학원생인 이 씨와는 MT 당일 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며 “피고인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았지만 나를 아랫사람으로 대하는 듯한 말투로 장난이었다고 말했는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고인 부모님들이 자영업을 하시는 부모님 식당에 무턱대고 찾아와 무례한 태도로 자식들을 옹호했기 때문에 언론 제보와 고소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언론 보도 이후에야 학교는 피고인들을 무기정학 조치했고, 피고인들의 부모들이 피해자와 피해자 부모를 찾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이날 열띤 공방을 벌였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성범죄의 관한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8조 1항, 4조 3항 등을 위반했고, 피해자 의사에 반해 피해자 성기를 촬영하기도 했다”며 “피해자는 음모와 배 부위에 치약이 묻어 상해를 입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변호인은 “피고인들이 배와 음모 부위에 치약 바른 사실 관계는 인정한다”면서도 “성적 충족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고 남자들끼리 할 수 있는 장난에 불과하다. 추행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윤리감정으로 봤을 때 형법상 범죄에 이르는 정도의 행위는 아니다. 영상 촬영도 요즘 스마트폰을 사용하니 장난으로 할 수 있다. 추행 의사가 있었으면 팬티도 확 벗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검찰은 “가해자가 성적으로 충족하지 않았더라도 당사자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면 추행 행위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에게 “이번 범행을 추행의 고의가 있는 행위로 볼 수 있는지, 추행이 된다면 상해가 인정되는 것인지를 가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변호인 측 증인 두 명의 신문도 진행됐다. 이 두 명 모두 피고인들과 A 씨와 같은 과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이 둘 중 한 명인 김 아무개 씨는 “술을 더 먹기 싫어서 다들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있었고 피고인 세 명이 들어와 치약을 피해 학생 몸에 발랐다. 2m 정도 떨어져 지켜봤는데 대수롭지 않은 장난으로 보여 그냥 보고만 있었다”면서 “다들 자고 있고 혼자만 깨어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하 씨가 김 씨의 휴대폰을 빌려 촬영한 영상을 확인하니 다수의 학생이 깨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김 씨는 피해자의 반응을 묻는 변호인단의 질문에 “‘미개하다’는 표현을 했고 불평,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았다”면서도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말했다. 검찰이 다시 김 씨에게 “경찰 조사 때는 합의금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고소를 생각할 정도로 화가 났다고 진술하지 않았냐”고 묻자 김 씨는 “형사가 마음대로 썼다”고 답했다.
두 번째 증인인 김 아무개 씨도 피해자와 같은 과 동기로, 피해자와 같은 신체 부위에 치약이 발라져 있었다. 김 씨는 “자고 일어나 치약이 묻어 있는 것을 보고 찝찝했다”면서도 “중, 고등학교 때 남자들끼리 흔하게 하는 장난이라고 생각했고 부끄럽거나 수치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피해자와 내가 치약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김 씨의 경우에는 피해자와 같이 촬영된 동영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 세 명은 모두 “사실관계는 인정하지만 성추행 의도가 없었다. 지금까지 성추행을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입장을 바꿔 본인이 당했다면 수치심이 들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또 동영상을 촬영한 이유에 대해 하 씨는 “잘 모르겠다. 술에 취해 장난기가 심해진 상태였고 추억거리로 만들기 위해 촬영했던 것 같다”고 답했다. 이들은 언론 보도 이후 학부와 대학원 측으로부터 무기 정학 통보를 받았다.
피해자의 국선변호를 맡은 김민선 변호사는 “피해자는 재수를 하고 큰 기대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이런 일을 당했다. 피해자가 이런 혐오심과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잠에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라며 “재판 도중 계속해서 중고등학교 때 치약을 바르는 것이 친구끼리 할 수 있는 장난이 아니냐고 언급되는데 이번 세 명 중 한 명은 안 지 얼마 안 된 동기이며 나머지 두 명의 선배는 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또 선배들이 신입생 엠티에 멘토 역할을 하러 왔는데 오히려 가해자 역할을 했다. 동영상에 성기가 노출되고 다른 사람이 돌려 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감을 느꼈을 수 있다”고 변론했다.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 이후 새벽 내내 배심원단의 평의가 이어졌고, 배심원 9명은 만장일치로 피고인에 대해 유죄로 평결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친분이 없는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것을 예상하고도 피해자의 옷을 벗겨 성기 주변에 치약을 바른 것은 고의가 인정된다”면서도 “피부염은 경미한 상태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치약을 바른 행위와의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 없다”며 이 씨와 하 씨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나머지 노 씨에게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