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겐 믿는 구석 따로 있었다?
▲ 공천 청탁 명목으로 30억을 편취한 혐의로 구속된 김옥희 씨가 지난 1일 서울중앙지검을 빠져나와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을 단순 사기극으로 축소하려 하고 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뉴시스 | ||
정치권 주변에선 이번 사건을 계기로 4·9 총선을 전후로 한나라당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돌았던 ‘공천 괴담’이 확대·재생산되는 등 각종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검찰도 사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이 대통령의 친인척이 연루된 사건인 데다 공천비리 뇌관을 건드릴 경우 정치권 전체에 메가톤급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분위기다.
여야 정치권은 이번 사건이 가공할 위력을 지닌 핵뇌관을 장착하고 있는 만큼 검찰 수사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과 사정기관 주변에선 이번 사건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은 각종 소문과 루머가 난무하면서 실체적 진실규명보다는 여야 간 치열한 정치 공방전 양상으로 치달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촛불시위가 일단 소강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뜻하지 않게 돌출, 이명박정부를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김옥희 게이트’를 둘러싼 4대 미스터리를 들여다봤다.
김옥희 씨의 ‘공천 장사’ 의혹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야권으로부터 사건 축소를 지시한 배후세력으로 청와대가 지목받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김 씨의 공천 청탁 의혹 사건을 일명 ‘언니게이트’로 규정하고 배후세력의 축소·은폐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청와대와 검찰이 사전에 공모해 사건을 단순사기죄로 몰아가는 등 미리 수사한계를 설정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사건 수사가 청와대와 검찰이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실체적 진실규명이 어려운 만큼 특검제 도입과 함께 김윤옥 여사에 대한 조사도 불가피하다는 강경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비리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주선 최고위원은 “수사권이 없는 청와대가 이 사건을 한 달 전에 인지하고도 뒤늦게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은 그동안 정보를 가공해 사건의 성격과 수사방향, 수사한계를 설정한 것과 같다”며 ‘청와대 배후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이번 사건은 대통령 친인척 비리이고 명백한 공직선거 관련 비리인데도 금융조사부에서 수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특검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김 씨가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입을 열면서 청와대와 검찰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점도 배후설을 부추기고 있다. 8월 7일 검찰과 김 씨 변호인에 따르면 김 씨는 최근 “청와대가 검찰과 짜고 나를 사기꾼으로 몰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청와대가 김종원 이사장을 비호하고 있다”며 청와대와 김윤옥 여사를 원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김옥희 씨가 청와대에 출입한 기록은 없다. 이번 사건은 청와대가 먼저 인지해 검찰에 넘겼을 뿐이다”며 청와대 배후설을 일축하고 있다. 권재진 대검차장도 8월 6일 대검찰청을 항의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이 “청와대와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따져 묻자 “서울중앙지검이 독자 판단한 것이지 청와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 이사장의 변호를 맡고 있는 한견표 변호사는 7일 <일요신문>과 전화통화에서 ‘청와대 민정팀과 김 이사장이 접촉을 가진 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접촉’이라는 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다”고 전제한 뒤 “청와대 민정팀이 사건을 먼저 인지했다면 사실 확인과 대책 마련 차원에서 접촉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한 변호사는 이어 ‘청와대와 김 이사장이 사건 확전을 막기 위해 사전에 교감을 나눴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이사장은 사기 피해자다. 김옥희 씨와 브로커 김 씨가 체포되기 전에 만남을 가졌던 것도 돈을 받기 위한 공증 차원이었지 사건 축소를 모의한 게 아니다. 청와대와 사전 교감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6일 기자와 만난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 친인척이 연루된 사건인 만큼 기초 조사와 사후 대책을 마련한 상태에서 검찰에 넘겼을 것”이라며 “청와대 스스로 단순사기 사건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에 미뤄 청와대가 축소·은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가 김 이사장의 비례대표 공천을 위해 여권 실세들을 상대로 로비를 시도했는지 여부는 검찰 수사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 변수다.
로비를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면 김 씨의 단순 사기극으로 결론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나아가 성공한 로비든 실패한 로비든 김 씨가 돈으로 한나라당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 공천 전반의 문제로 이어져 ‘공천게이트’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3일 김옥희씨 사건과 관련 민정수석실에서 이 사건을 먼저 포착해 검찰에 이첩했다고 밝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브로커 김 씨도 변호인을 통해 “김옥희 씨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한나라당 최고위층 인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녔다. 특히 오늘은 ‘누구를 만났다’ ‘누구에게 돈이 들어갔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다녔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이 같은 당시의 정황은 김 씨가 대한노인회 추천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한나라당 실세들을 상대로 전 방위 공천로비를 시도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공천로비 쪽에 힘이 실리면서 김옥희 씨와 김 이사장 등 사건 핵심 인사들이 접촉한 여권 거물급들이 누구인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김 씨의 로비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사건 정황상 이들이 여권 실세들을 두루 접촉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 것이란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 신청이 한창이던 3월 12일 한 네티즌이 이 전 의원의 홈페이지에 “김 이사장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투고성 글을 올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게 발단이 됐다. 이 전 의원이 김 이사장을 잘 알고 있고 김 이사장의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글이 올라온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 전 의원 측은 이에 대해 “김 이사장을 잘 알지도 못한다”며 “허무맹랑한 음해”라고 일축하고 있다. 여권에서도 당시 이 전 의원이 공천에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 누군가 올려놓은 글만 가지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지나친 정치공세라는 반응이다.
김옥희 씨의 부탁으로 김 이사장 공천 탈락 이후 청와대 진정서를 써준 대한노인회 안 회장이 “김 씨의 뜻이 대통령의 뜻인 줄 알았다”고 밝힌 대목도 파문이 확산되는 또 하나의 불씨가 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사건에 보이지 않는 진짜 거물급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이른바 ‘몸통론’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의회 의원을 지낸 바 있고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측근으로 행세해온 김 이사장이 직접 나서지 않고 김 씨에게 3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해 공천을 받으려고 했던 부분도 석연치 않다. 김 씨를 통해야만 했던 말 못할 사정이 있거나 김 씨 배후에 믿을 만한 ‘몸통’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검찰이 당초 이번 사건을 단순사기죄로 몰고 가려고 했던 것이나 김 이사장의 신병을 신속하게 확보하지 않았던 사실도 ‘몸통론’을 부추기고 있다. 대통령 친인척이 연루된 중요한 사건의 핵심 당사자를 방치하고 있던 진짜 속사정이 뭔지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김 이사장이 김옥희 씨에게 공천 로비자금 명목으로 건넨 30억여 원의 출처와 구체적인 용처도 풀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검찰은 김 이사장이 조합 측 돈을 횡령해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김 이사장은 8월 10일 소환 조사한 데 이어 조합 측 관계자들도 조만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김 이사장 측 한 변호사는 “횡령 의혹이 제기돼 확인해 본 결과 30억 원은 김 이사장의 개인 돈으로 파악됐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김 이사장이 공천에서 탈락한 이후 김 씨가 30억여 원 중 25억 4000만 원을 여러 차례 나눠서 반환한 경위와 나머지 5억여 원의 용처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김 씨는 25억 4000만 원을 4월 초부터 중순까지 20억 원, 2억 원, 2억 원, 9000만 원, 5000만 원 등으로 나눠 5차례에 걸쳐 반환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환 시점도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결과가 발표된 3월 24일로부터 7일~20일 정도 지난 뒤였다.
일부에서는 김 씨가 자금을 정치권 등 제3자에게 전달했다가 공천 탈락 함께 반환 독촉을 받게 되자 급하게 돈을 회수하거나 급전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게 아니냐고 관측하고 있기도 하다. 검찰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결과 발표일(3월 24일) 이전에 김 씨 계좌에서 1억 원 단위로 세 차례 3억여 원이 인출됐고 3월 말 3억여 원이 한꺼번에 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의 추적 결과 인출된 자금 중 일부는 오피스텔과 자동차 구입 등 김 씨 개인 용도로 사용됐고 일부는 가족 명의 계좌에 유입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김 씨가 김 이사장에게 4월 이후 25억여 원을 돌려줬다는 점을 감안할 때 3월에 인출된 6억여 원 중 1억여 원은 김 씨가 김 이사장으로부터 받은 돈과는 다른 자금인 것으로 판단하고 용처 파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검찰은 이 돈이 김 씨 개인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만 또 다른 공천 로비 자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선 김 씨가 한나라당 외에 다른 정당에 대해서도 공천 청탁을 받았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는 만큼 검찰의 용처 수사 결과에 따라 제2, 제3의 공천비리로 확전될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