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복원 절실” 홍석현·서훈 등 거론…일각선 ‘신중론’ 주문
2000년 6월 제1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좌)과 김대중 대통령(우) 사이에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가운데)이 자리하고 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남북 관계사에 있어서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입북을 지시한 첫 대북특사다.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수면 위로 대북특사 카드가 거론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미국 정부 소속 매체 <VOA>에 따르면, 캐슬린 스티븐슨 전 주한 미국대사를 비롯한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소장 신기욱) 소속 선임 연구원들은 15일 공동 제안문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공백이 생긴 한-미 관계를 하루빨리 이전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 제안문에는 “남북 간 대화가 적당한 시점에 추진되고, 미국의 ‘페리 프로세스’와 같은 방식을 한국의 ‘특사’가 이끈다면 이는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적당한 시점’이란 전제가 붙긴 했지만, 한국 정부의 대북특사 임명을 주문한 셈이다.
미국의 전직 고위급 관료가 직접 ‘대북특사’를 언급한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스티븐슨 전 대사가 언급한 ‘페리 프로세스’는 1998~99년 윌리엄 페리 당시 대북조정관이 내놓은 ‘북핵 동결’ 프로세스다. 미 전직 관료가, 그것도 미 외교 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스탠퍼드대 소속 연구원이 직접 ‘대북특사’를 언급한 것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 대통령은 이미 지난 취임식에서 북한과의 대화 재개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남북 관계 회복에 선행되어야 하는 남북 간 특사 교환 가능성 여부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 특사 임명 및 교환은 역대 남북 관계의 중요한 시점마다 이뤄져 왔다. 시초는 탈냉전 시기였던 1972년 5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으로 보내면서 남북관계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북한 역시 박성철 당시 부수상을 남으로 보내 화답했으며, 결국 남북은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이후락 중정부장의 신분을 엄밀히 따지면, ‘특사(special envoy)’보다는 ‘밀사(emissary)’에 가까웠다. 이후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 안기부장,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정무장관 등 실권자들이 대북 밀사 역할을 꾀했다.
정식으로 대북특사가 임명된 것은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 특사 교환을 촉구했다. 김 대통령은 결국 두 달 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을 대북특사로 임명해 북으로 보냈다. 임동원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권 시절 총 세 차례에 걸쳐 대북특사 임무를 수행하며 ‘햇볕정책’의 총 지휘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임동원 국정원장은 남북 분단 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을 조율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2005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북핵문제 등을 조율한 바 있다. 또한 이들은 2007년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알려졌다시피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북특사 임명 및 임무수행, 남북 간 특사 교환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남북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핵심 경협사업도 중단하며 사실상 ‘남북 채널’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남북 대화 재개를 시사했다. 사진=국회공동취재단
이어 한 전 부총리는 “오랜 기간 남북 관계가 소원했다. 지금은 남북 간 신뢰 구축이 우선”이라며 “북에서도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해야 한다. (북한이) 생소한 인물을 보내면 도리어 문제가 꼬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전 부총리는 이번 정부의 대북특사로서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북과 직접 교류하며 신뢰를 쌓았던 인물을 추천했다. 즉, 신뢰를 통해 오랜 기간 채널이 끊어지다시피 한 남북 관계를 빠른 시일 내에 복구할 수 있는 인물이 적임자라는 뜻이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전문가는 ‘신중론’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전문가는 “대북특사는 너무 섣부른 얘기”라며 “미국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우선 홍석현 대미특사가 트럼프 정권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가져올 것인지를 봐야 한다. 북핵 문제는 이미 남북관계를 한참 넘어선 이슈다. 당장 대북관계에 속도를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주변에선 문재인 정부의 대북특사 후보로 여러 인물이 거론되고 있다. 우선 현재 대미특사 임무를 수행 중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거론된다. 홍 전 회장은 문 대통령 당선 이전 이미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대미특사’는 물론 제안이 온다면 ‘대북특사’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한-미 간 공조가 중요하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주미대사 및 대미특사 임무는 물론 수차례의 방북경험도 있는 홍 전 회장이 대북특사 임무를 수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전례를 비춰볼 때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도 유력시되고 있다. 이미 이전 정부에서 현직 국정원장(이전 안기부장 및 중앙정보부장 포함)이 대북특사 역할을 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 후보자는 안기부 입사 이후 줄곧 대북통으로 재직했다. 그는 1990년대 북한의 경수로 건설사업을 주도했던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에 몸담으며 오랜 기간 북한에 상주했다. 또한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실무급 간부로서 정상 회담을 비롯해 다수의 남북 회담을 기획하고 수행한 인물이다. 앞서 한완상 전 부총리의 ‘조건’만 놓고 보자면 적임자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오랜 기간 끊긴 남북 채널을 개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남북 관계의 상징성이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햇볕정책의 설계자였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 참여정부의 통일정책 및 대외정책의 주역이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참여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이자 남북정상회담 수행자였던 이재정 경기 교육감 등이 대북특사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