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호 다섯 번으로 최다…툭하면 항의하다 퇴장당한 김용용 자리 ‘땜빵’
지난 23일 KBO 리그 역사에는 감독 대행이 또 한 명 추가됐다. 김성근 한화 감독이 중도 퇴진하면서 이상군 투수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됐다. 이 대행은 KBO리그 역대 55번째 감독 대행이다. 감독의 해임 혹은 사퇴로 대행을 맡게 된 사례로만 따지면 역대 38번째다. 김 감독이 갑자기 떠난 23일 경기부터 곧바로 대전구장 더그아웃 감독석에 앉았다.
# 감독대행, 어느 팀이 많이 뒀나
그동안 역대 가장 많은 감독대행이 거쳐 간 팀은 LG(전신 MBC 포함)와 롯데, 현대(전신 삼미-청보-태평양 포함)다. 총 여덟 차례나 감독대행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그 다음이 감독대행 7명을 뒀던 두산(전신 OB 포함)과 해태. 그 뒤로는 삼성(5회)-한화·쌍방울(4회)-SK(3회)-넥센(1회) 순으로 이어진다. 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독 대행을 두지 않았던 팀은 2010년 이후 출범한 두 구단밖에 없다. NC는 초대 김경문 감독이 6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다. kt는 1대 조범현 감독이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뒤 2대 김진욱 감독이 부임했다. 김경문·조범현·김진욱 감독 모두 임기 내 전 경기를 무탈하게 지휘했다.
김성근 전 감독 후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은 이상군 투수코치. 연합뉴스
사실 55차례에 달하는 감독 대행 사례 가운데 약 30%(17회)는 감독의 개인 사정에 따른 ‘한시적 대행’이었다. 지난해 5월 한화 김성근 감독이 시즌 도중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게 돼 김광수 수석코치가 15일간 지휘봉을 잡았던 사례와 같다. 1997년 백인천 전 삼성 감독도 건강 문제로 두 차례 자리를 비운 적이 있다. 그해 6월 28일 극도의 스트레스에 따른 고혈압과 뇌출혈로 쓰러져 한동안 조창수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국 9월 2일 LG와의 더블헤더 제1경기가 끝난 뒤 병원으로 갔다. 조 대행이 더블헤더 2차전부터 다시 지휘봉을 잡았고, 돌아오지 못한 백 감독 대신 플레이오프까지 선수들을 이끌고 시즌을 마쳤다.
LG 역시 초창기 고 김동엽 감독의 영향으로 감독 대행 체제가 잦았다. 해태 초대 사령탑이었던 김 감독은 1983년 MBC 지휘봉을 잡고 팀을 한국시리즈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구단이나 선수단과의 불화로 세 차례나 팀을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유백만 코치와 한동화 코치가 전임 백인천 감독 시절부터 김동엽 감독 시절까지 각각 세 차례와 두 차례씩 감독대행을 맡아야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래도 가장 여러 차례 감독 대행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은 유남호 전 KIA 감독이다. 다섯 번이나 감독 대행을 맡아 역대 최다 기록을 남겼다. 주로 ‘코끼리’ 김응용 감독을 대신해 감독석을 지키곤 했다. 다혈질인 김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하면,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9월 4일, 1999년 5월 1일, 2000년 9월 1~3일, 2000년 10월 5일처럼 ‘하루 천하’ 혹은 ‘사흘 천하’로 기록된 날이 네 번이나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지난 2004년 기아 타이거즈의 김성한 감독이 전격 경질된 가운데 김 감독의 지휘봉을 이어 잡은 유남호 감독 대행. 연합뉴스
# ‘대행’ 꼬리표, 떼기가 쉽지 않다
사실 감독 대행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도 없다. 잘해야 본전.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대부분 전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난 뒤 지휘봉을 이어 받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2004년 7월 김성한 감독의 대행으로 나선 유남호 감독 대행은 후반기 26승 18패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위권에 처졌던 KIA를 준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다. 이듬해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2001년 5월 LG 이광은 감독의 바통을 이어 받았던 김성근 감독 대행도 그랬다. 잔여 경기 49승 42패로 승률 5할을 넘기면서 LG에 다음 시즌을 향한 희망을 안겼다. 역시 정식 감독이 돼 이듬해 LG를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드문 사례일 뿐이다.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감독이 시즌 도중 물러날 정도로 바닥으로 처진 팀이다. 정식 감독도 아닌 감독 대행의 지휘 아래 극적인 반등을 이뤄내기란 쉽지 않다. 감독 대행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만한 환경과 권한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전임 감독은 “감독 대행 체제에서 팀 성적이 이전보다 상승한다고 해서 감독 대행의 역량으로 갑자기 팀이 달라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전임 감독이 떠나면서 일시적으로 분위기가 전환된 효과가 오히려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역대 감독 대행을 거친 33명 인사 가운데 ‘대행’ 꼬리표를 떼고 감독으로 정식 계약한 인물은 총 14명밖에 없었다. 이재우 윤동균(이상 OB) 이희수(한화) 유남호 서정환(이상 KIA) 유백만 천보성 김성근(이상 LG) 이만수(SK) 강병철 김명성 우용득(이상 롯데) 강태정(청보) 김준환(쌍방울) 등이다.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은 2006년 LG에서 이순철 전 감독을 대행해 잔여 시즌을 치른 뒤 2012년 롯데에서 프로야구 감독이 된 케이스다.
그리고 그 가운데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끌었던 인물은 강병철 감독(1984년)과 이희수 감독(1999년)밖에 없다. 범위를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넓히면 천보성 감독(1997·1998년)과 김명성 감독(1999년), 김성근 감독(2002년)까지 해당된다.
롯데 강병철 감독. 연합뉴스
감독 대행을 맡았다가 정식 감독으로 연착륙한 첫 사례는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이 남겼다. 강 감독은 1983년 7월 박영길 초대감독이 사임하자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1984년 롯데 2대 감독으로 정식 취임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다. 롯데에서는 이후 같은 사례가 두 번 더 나왔다. 1998년 6월 김용희 감독이 떠나면서 김명성 감독 대행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1999시즌을 앞두고는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김명성 감독도 앞서 언급한 백인천 감독처럼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다. 결국 2001년 7월 퇴진했고, 그해 끝내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남겼다. 당시 김명성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받은 우용득 감독 대행은 남은 시즌을 무사히 마치고 이듬해 감독이 됐지만, 한 시즌을 채 채우지 못하고 2002년 6월 중도 퇴진했다.
두산에서는 이재우 전 감독이 처음으로 대행 출신 감독에 올랐다. 1990년 5월 이광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면서 이재우 감독 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을 치렀고, 시즌 종료 후 이 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이 감독 역시 한 시즌을 못 넘기고 1991년 7월 다시 시즌 도중 물러났다. 이때 감독 대행을 맡은 윤동균 코치 역시 한 달 뒤 차기 감독으로 임명됐다. 이후 두 시즌을 무사히 이끌었다. 그러나 1994년 9월 선수단 항명 파동에 휘말리면서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주억 감독 대행이 남은 14일을 대신 지휘했다.
한화에서는 이희수 전 감독이 유일한 대행 출신 감독이다. 이 감독은 1998년 7월 건강 문제로 물러난 강병철 감독 대신 지휘봉을 잡았고, 이듬해 정식 감독 자리에 올랐다. 감독 첫해인 1999년 한화를 창단 후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박수도 받았다. 그러나 역시 스트레스가 문제였다. 그해 중반부터 귀 뒷부분에 종양이 자라기 시작해 결국 이듬해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2000년 11월 임기를 마친 뒤 끝내 재계약을 포기했다.
감독 대행으로서 역대 가장 성적이 좋았던 유남호 대행은 이듬해인 2005년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정작 ‘감독’으로서는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2005년 7월 25일까지 팀을 이끌다가 1년도 안 돼 지휘봉을 서정환 감독 대행에게 넘겼다. 서 대행은 역시 3개월간 남은 시즌을 무사히 마친 뒤 그해 10월 유 감독에 이은 KIA 차기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후 2007년까지 2년간 팀을 이끌었다.
LG의 전신 MBC는 1987년 7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동엽 감독이 퇴진한 뒤 유백만 코치에게 세 번째 감독 대행을 맡겼다. 유 대행은 그 시즌을 마치고 마침내 정식 감독으로 올라섰다. 다만 임기는 길지 않았다. 1988년 한 시즌이 전부였다. 1996년에는 천보성 감독 대행이 7월부터 이광환 감독 대신 팀 지휘를 맡았고, 이듬해부터 1999년까지 3년간 감독으로 LG를 이끌었다. 김성근 전 감독은 2001년 5월 이광은 전임 감독의 대행으로 바통을 넘겨받았다가 그해 말 정식 감독으로 계약했다. LG는 김성근 감독 체제였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했지만, 김 감독은 구단과의 불화로 인해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SK는 2011년 8월 김성근 감독이 퇴진하자 이만수 수석코치에게 감독 대행을 맡겨 시즌을 마쳤다. 이만수 대행은 이듬해부터 정식 감독이 돼 3년간 SK를 이끌었다. 청보에선 1986년 8월 강태정 감독 대행이 허구연 전임 감독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뒤 1987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 사례가 있다.
삼성은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감독 대행을 감독 자리에 앉힌 적이 없다. 1983년 5월 재일교포 이충남에게 서영무 초대 감독의 대행을 맡긴 뒤 내심 차기 감독으로도 고려했던 게 전부다. 그러나 당시 국민 정서상 대구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1997년 백인천 감독을 대신해 포스트시즌까지 치렀던 조창수 감독 대행 역시 차기 사령탑으로 서정환 전 감독이 선임되면서 승격이 무산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비운의 감독 김준환, 쌍방울서 한 경기도 못치르고 ‘퇴진’ 김준환 원광대 야구부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비운의 사령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히 감독으로 기록돼 있지만, 승리도 패전도 기록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던 탓이다. 김준환은 선수 시절 해태에서 뛰면서 김성한, 김봉연과 함께 그 유명한 ‘KKK 타선’을 이뤘던 외야수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초창기 해태의 스타플레이어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강한 타자로 유명했다. 1982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우익수 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도 뽑혔다. 선수 시절의 감준환 감독. 연합뉴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외야수 출신 감독은 드물었다. 투수, 포수, 내야수 모두 감독에 적합한 포지션으로 평가 받았지만, 외야수 출신 감독에 대해서는 늘 ‘세밀함이 떨어진다’는 부정적 시선이 우세했다. 김 감독 이전에도 외야수 출신 감독은 1982년 삼미 박현식 감독, 1987년 삼성 박영길 감독이 전부였다. 김 감독은 역대 세 번째 외야수 출신 감독이었다. 편견을 깰 수 있는 기회였다. 꿈에 부풀었다. 함학수 수석 코치와 박철우 타격 코치가 포함된 코칭스태프를 구성하고, 감독으로서의 새 출발을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운이 닥쳤다. 예견된 사태이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온 게 문제였다. 김준환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된 지 두 달 만인 2000년 1월 쌍방울이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인해 해체됐다. 아직 감독으로서 단 한 경기도 팀을 지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쌍방울을 인수한 SK가 해체 후 재창단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고용도 승계되지 않았다. SK는 2000년 3월 창단하면서 김준환이 아닌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모셨다. 쌍방울의 6대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인 김준환의 임기는 1999년 11월 1일부터 2000년 3월 31일까지 단 4개월로 기록됐다. 김준환은 프로 감독으로서 공식 경기를 치러보지 못한 채 다시 SK에서 수석코치로 새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감독이라는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김준환이 또 한 번 프로야구 지휘봉을 잡은 것은 강 감독이 시드니 올림픽 코치로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2000년 9월이 마지막이었다. 짧은 감독 대행 기간을 마친 뒤 김준환은 SK에서 해임됐다. 내내 한이 남을 수밖에 없는 일장춘몽이었다. 그래도 대학 야구 감독으로서는 충분히 성공을 거뒀다. 그는 코치 생활을 그만둔 뒤 전주에서 사업을 하다 2003년부터 15년째 원광대 야구부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