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홍준씨 | ||
일본의 주간지 <주간문춘>은 최근호에서 김정남의 사업 파트너인 재미교포 실업가 윤홍준씨(37)와 접촉하여 그의 근황을 밝혔다. 윤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그 후로도 워싱턴에 거점을 두고 정보통신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필리핀에서 의류가공업을 일으켜 성공해, 필리핀 정부가 그를 통해 한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의뢰할 정도의 인물이라고 한다. 다음은 윤씨의 이야기를 정리한 기사내용이다.
96년 2월, 워싱턴에 있던 나에게 북한계 재미교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필리핀에서 사업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지금 캐나다에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 올 수 없으니 함께 캐나다로 갈 수 없겠습니까?”
캐나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북한 노동당 산하의 기업에 있다는 남자였다. 그는 여러 가지 사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경험으로, 정부를 상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위 관료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윗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의 의사를 평양에 전했고, 그 해 5월에 김정남과 만나게 되었다.
그와 처음 만난 장소는 베이징의 고급 호텔에 있는 일식집이었다. 그는 명함도 없었으며 직함도 말하지 않고, 단지 “내가 김정남이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내 사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의 질문에서 이미 나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후 김정남은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가장 흥미를 나타낸 것은 경제특구 개발이었다. 나는 필리핀에서 미군기지가 철수한 자리를 이용한 ‘수빅만 자유경제구’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계속 그 이야기를 묻는 것이었다.
“우리(북한)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하다. 중국, 러시아, 일본과 같은 나라들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며 북한에 경제특구를 만든다는 구상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김정남은 온화한 표정으로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침착하게 행동했다. 사물을 보는 넓은 시야와 여유로운 분위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지도자가 사업에 대해 알아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나 역할에 대해 밝히지는 않았지만, 수행원들을 보면 그의 지위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의 사업을 보좌하는 것은 북한 체신성(遞信省)에 있는 부서였다. 북한에서 체신성이라면 상당히 중요한 곳이다. 김정일에게 직접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군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체신은행’은 외화획득이나 무기매매 등을 맡고 있어 상당히 힘이 있는 조직이다.
김정남은 처음에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할아버지인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 일이 있다. 이복형제인 김정철과 정운의 이야기도 했다. 그는 김정철에 대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있는데,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아직 어리지만 똑똑한 아이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와서 사업을 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에 20대 중반인 이복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 아이들 선물을 사는 것을 보고 그에게도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만나고 얼마 후 나는 북한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 후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북한에 갔다. 그리고 평양에서 ‘황태자 그룹’이라 불리는 당간부 2세들을 소개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96년 말에 나진·선봉 경제특구에서 투자자 포럼이 열렸다. 많은 투자자들이 있는 곳에서 김정남은 “사람들 눈을 피해서 방으로 오라”고 했다. 방으로 찾아가자 “내 자본을 위탁할테니 운용해달라”고 제안했다. 금액을 묻자 1억8천만달러(약 2천억원)라는 것이었다. 그는 은행의 예금증서를 보여줬는데, 예금은 독일계와 일본, 홍콩의 은행에 각각 예치되어 있었다. 예금증서도 모두 발행한 지 1개월 이내의 것이었다.
▲ 김정남 기사가 실린 <주간문춘> 지면. | ||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녔기 때문에 연락은 주로 이메일로 했지만, 그의 부하가 메시지를 가지고 오거나, 제3자가 대신 전화를 거는 일도 있었다. 그런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무기 거래나 개인적으로 구입하고 싶은 물건의 리스트를 보낸 적도 있다. 휴대형 도청방지 장치, 선박용 고속엔진 등을 “3~4개국을 거쳐서 최종 사용자가 드러나지 않게 수입할 수 없겠는가?”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당한 사업 외에는 모두 거절했다. 단 밀수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김정남과 만난 것은 97년이었다. 나는 다른 일로 일본에 있었는데, 마침 그도 일본에 온다고 해서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사카에서 일을 끝내고 온 것인지 “신칸센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어떤 청년실업가와 함께 왔다.
이때 김정남의 방일 목적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자세히 물을 수는 없었으나, 김정일의 한국방문에 대한 협상과 무기 대금회수에 관한 것 같았다.
긴자에서 만나 저녁을 먹은 후 아카사카에 있는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상당히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큰 소리로 웃지만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또한 1백달러, 2백달러씩 팁을 주는 일도 많았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해서, 일본이나 한국의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 일본에서는 영어로 된 노래를 많이 불렀고, 중국에서는 한국노래를 불렀다. 김정남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도 약간 할 줄 알았다. 당시 그가 묵었던 곳은 도쿄의 심바시(新橋)에 있는 다이이치(第一)호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총련계가 경영하는 호텔에도 자주 묵었으며, 요코하마에는 단독주택도 있다고 했다.
2001년 봄에 김정남에게 “5월에 일본에 가니 다시 만나자”는 이메일을 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 직후에 그가 구속된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일본에서 강제출국을 당한 후 주로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계속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받고 있다. 매일처럼 연락이 오는 일도 있지만, 몇 개월 동안 연락이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전혀 예상을 할 수 없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해외를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여름에도 모스크바에서 만날 예정이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됐다.
당분간 김정남이 일본에 가는 일은 없겠지만, 세상의 관심이 식으면 반드시 다시 입국하려 할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배짱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