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에서 청와대의 뜻을 어기고 출마를 한 친구가 검찰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걸려든 것인지 괘씸죄에 걸려 수사대상이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선거 때 선거사무소를 빌린 비용 등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문제 삼아 구속시킨 것이다. 배경이 의심스러웠다. 담당 수사검사가 솔직한 내막을 털어놓았다. 수사 상황을 매일같이 높은 곳에 보고하고 지침을 받아 수사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수사를 하는 검사가 아니라 정무를 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서로 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밀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은밀히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이 그런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취지인 것 같았다. 그 친구는 그 사건으로 정치적 생명이 뇌일혈을 일으킨 것 같았다.
나는 얼마 후 변호사 일에서 사실상 해임이 됐다. 검찰 출신의 유능한 변호사가 ‘플리 바겐(검찰이 사건 관련자 및 피의자와 협상을 통하여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량을 경감하거나 조정하는 제도)’을 해야지 나 같은 무능한 변호사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변호사도 검찰 앞에서 비굴할 정도로 기어야 사건을 맡을 수 있지 바른 소리를 하면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에게 변호사라는 직업은 권력에 각을 세우고 저항하는 것이었다. 어둠침침한 뒷골목에서 폭행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 소리쳐 주는 역할이라고 할까. 그런 노력조차 막히는 경험을 종종 겪었다.
변호사를 하던 삼십대 중반 잠시 정보기관에 들어가 법률담당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 직속의 정보기관이 검찰이나 세무서에 보내는 정보는 명령 같은 무게를 지녔고 당하는 사람은 파멸을 의미했다. 정보기관과 검찰이 권력의 시녀역할을 할 때 대통령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될 수 있었다. 기관의 속성은 개에게라도 권력의 옷을 입히면 거기에 복종한다. 대통령이나 측근은 정보기관과 검찰이나 경찰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특정 개인을 파괴시키는 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검찰의 역할이 단순하게 경찰이나 정보기관으로 수평이동된다면 의미가 별로 없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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