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 집 벽장 속에서 5년간 ‘소꿉놀이’
▲ (왼쪽부터)‘벽장소녀’라 불리는 나타샤 라이언. 실종 당시인 14세 때 모습. 가운데는 최근 모습. 남자친구인 스코트 블랙. | ||
지금 호주는 ‘벽장소녀’로 알려진 나타샤 라이언(21)의 기막힌 ‘가출 스토리’로 들끓고 있다. 지난 1998년 실종된 후 수년간 행방이 묘연하자 가족들은 소녀가 납치 살해된 것으로 믿고 장례식까지 치른 채 절망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녀가 실종된 지 5년 만인 지난 2003년 멀쩡히 살아서 발견된 것 아닌가. 그것도 집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곳에 숨어 있었다니 놀라 까무라칠 일. 소녀가 그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 지냈던 곳은 바로 남자친구의 집이었으며, 그동안 외부와의 접촉은 일체 피한 채 벽장 속에 숨어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2년이 흘렀건만 아직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소녀가 숨어 지내는 동안 한 사내가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가 하면 재판 과정에서 소녀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한 남자친구인 스코트 블랙(28)이 최근 위증죄로 유죄를 선고받는 등 일이 복잡하게 꼬여 버렸기 때문이다.
먼저 사건의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14세였던 사춘기 소녀 라이언이 가출을 결심했던 것은 부모의 이혼과 원만하지 못했던 학교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호주의 방송 프로그램인 <60분>과의 인터뷰에서 라이언은 “당시 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집에도 가기 싫었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도피하고 싶을 뿐이었다”며 가출 이유를 밝혔다.
이에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라이언은 1998년 8월 어느 날 세상으로부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증발해버린 것이다. 당시 소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실종 당일 학교까지 태워다 준 어머니였으며, 그로부터 5년 동안 소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가출이겠거니 생각했던 가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경찰의 도움으로 이리저리 수소문했지만 소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단지 신원불명의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한 통의 제보만 있을 뿐 소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3년이 지나자 가족들은 마침내 소녀가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믿고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조촐한 추모식까지 치렀다.
그러던 중 실종된 지 4년 만에 소녀를 살해한 용의자가 나타났다. 어린 소녀들만을 골라 살해한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레오나르드 프레이저(51)가 스스로 “내가 라이언을 살해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라이언을 포함한 네 명의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그가 법정에 서자 ‘라이언 소녀 실종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당시 심리 과정에서 증인으로 참석한 라이언의 남자친구 블랙은 “나 역시 라이언이 실종된 후로 만나지 못했다. 만일 그녀가 살해된 것이 맞다면 경찰의 수사에 도움이 되도록 협조하겠다”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진행된 프레이저의 재판에서도 여전히 블랙은 “라이언의 소재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거짓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증언대에 선 지 불과 하루 만에 그의 집 벽장 속에서 버젓이 소녀가 발견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프레이저의 재판이 한창일 무렵 결정적인 제보가 담긴 편지 한 통이 담당 형사에게 전달되었다. 익명의 제보자가 보낸 이 편지에는 소녀가 숨어 지내고 있다는 집주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으며, 이 주소는 다름아닌 블랙의 집주소였던 것. 이에 따라 즉시 블랙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마침내 벽장 속에 숨어 있던 라이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소녀가 살해된 것으로 굳게 믿고 있던 소녀의 가족은 물론이요, 프레이저의 재판이 열리고 있던 법정은 발칵 뒤집혔다. 재판은 연기됐고,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벽장소녀’ 라이언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됐다.
그렇다면 소녀는 지난 5년 동안 어떻게 지내 왔을까. 믿지 못하겠지만 라이언이 5년 동안 집밖으로 외출한 횟수는 단 네 차례였으며, 그것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밤중에 몰래 바닷가를 산책한 것이 전부였다.
또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창문에는 항상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때문에 집안에 햇빛이 드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소녀의 취미는 TV를 보거나 실내 헬스기구로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고, 학교를 갈 수 없었던 까닭에 인터넷으로 독학을 해야 했다. 또한 쇼핑을 갈 수도 없었으므로 옷도 직접 만들어서 입었다. 간혹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면 벽장 속에 숨어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녀는 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집이 그립지는 않았을까. 이에 라이언은 “처음에는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혼날 것이 무서웠다. 부모님이 나를 감옥으로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때로는 몇 차례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녀는 점차 남자친구와의 동거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은신하던 중 드디어 자신을 살해한 혐의로 한 남자가 기소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한 그녀는 놀란 마음에 ‘아동전화상담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야기를 상담하기도 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와중에 마침내 경찰에 의해 발견된 그녀는 지금은 “너무 자유롭고 홀가분하다”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다. 나름대로 은신 생활에 만족하고는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답답함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현재 블랙과의 사이에 한 살 된 아들을 두고 있는 그녀는 위증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블랙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어린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강제로 가둬 두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반박하고 있는 라이언은 “내가 결정한 일이었고, 내가 좋아서 숨어 있었다”며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족을 비롯한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숨어 있는 것을 알리지 말도록 부탁한 것도 자신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블랙 역시 법정에서 “나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며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는 위증죄로 14년 형을 선고받을지도 모르는 상태다.
어린 소녀의 단순한 가출 사건이 그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