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사찰·해킹…이번엔 ‘자백’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임명장 수여식을 마치고 서훈 국정원장 등과 티타임을 갖기 위해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TF가 재조사할 사건은 다음과 같다. ‘국정원 댓글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에 이은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박원순 서울시장 사찰, 불법 해킹, 보수단체 지원, 최순실 게이트 연루.’ 모두 정치적으로 여야가 뜨겁게 맞붙었던 사안들이다.
우선 국정원 댓글 사건은 2012년 18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상부 지시에 따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에 대한 비방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이다. 이로 인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원 전 원장은 2015년 대법원에서 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 된 뒤 최근까지도 파기환송심 재판부에 계류 중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이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채동욱 혼외자’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댓글 사건이 터지고 한 달 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 불거졌다. 2012년 탈북한 뒤 서울시 탈북자 담당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유우성 씨가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그러나 유 씨는 2015년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이 제출한 증거가 조작됐고 자백이 강요됐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장이 일었다.
NLL 논란 관련해 국정원이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점도 여전히 의문 부호다. 국정원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2013년 2급 비밀인 관련 대화록 일부를 공개했다. 국정원이 여야의 통일된 요청이 없었는데도 전문을 공개하자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민주당은 “쿠데타 또는 내란에 해당하는 항명”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른바 ‘박원순 제압 문건’도 재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국정원은 2013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로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이라는 문건을 작성해 박 시장을 사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문건엔 헌법기관을 활용한 정치 공작 차원의 대응 방안과 보수 진영 등 민간단체로 하여금 박 시장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성하게 하는 계획까지 포함됐다고 전해진다. 검찰은 이 문건이 국정원의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다. 2015년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 판매업체 ‘해킹팀’으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해 불법 감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국정원은 “프로그램은 대북·대테러용”이라고 해명했으나 사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국정원 직원 임 아무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임 씨는 유서에 “해킹 프로그램은 대북 대테러 활동을 위해서 썼지만 내국인에 대해서는 절대 쓰지 않았다. 이번 일로 국정원의 명예가 실추된 데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적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국정원은 또 다시 도마에 올랐다. <한겨레>는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특검 조사에 출석해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지원금을 댔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이 전 국정원장은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단체에 대한 지원은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라며 “내가 있던 시절에도 지원을 했고, 지금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상세한 내역에 대해선 말하기 어렵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순실 게이트 연루설도 규명되어야 할 문제다. 올해 3월 김영주 민주당 최고위원은 “국내 정보 수집을 총괄하는 추 아무개 국장이 우병우 전 수석과 안봉근 전 비서관에게 최순실에 대한 국정원 내부 정보를 보고해 왔다는 의혹이 지난해 12월 말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제기된 바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TF를 감찰실 산하에 두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조남관 서울고검 검사를 감찰실장으로 발탁한 배경이 관심을 모은다. 외부 인사를 국정원 감찰실장에 기용한 것은 그만큼 개혁에 대한 의지를 뒷받침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는 “개혁의 동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국내 정치 사찰뿐 아니라 여론을 호도하거나 조작해왔다는 의혹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을 정상화시키는 출발점으로 TF를 구성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야권은 반발하는 모양새다. 김성원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6월 11일 “과거 민주당이 국정원에 정치개입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정치 쟁점화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거나 검찰 수사 등을 통해 규명된 사안들”이라며 “이에 대한 재조사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끼워 맞추기식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적폐청산을 가장한 정치 보복 선언”이라고 밝혔다.
국정원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적폐 청산이 대대적인 물갈이식 인사로 이어질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로 정권 초 국정원에서는 지난 정권 지우기 차원에서 큰 폭의 인사가 이뤄지곤 했다. 한 전직 국정원 직원은 “국정원 과오를 바로 잡겠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있다. 국정원이 잘못한 것은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를 인사와 연결시키면 5년 후 또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자칫 정치보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