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술한 고전들, 전설들의 공통점이 있다. 죽어 염라대왕 앞에 서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 그 무서운 염라대왕도 악행만을 들이대어 영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이집트의 염라대왕 오시리스 앞에서 그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심장의 무게달기’라고 한다.
염라대왕은 영혼이 살아서 했던 선행과 악행의 무게를 잰다. 선행이 악행을 이기면 천국, 혹은 좋은 내세가 기다리고 있고, 악행이 선행을 이기면 급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을 경험해야 한다. 물론 천국이든, 지옥이든, 축생이든, 영원하지 않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지은 복만큼, 지은 죄만큼 받고 다시 시작한다.
새 정부 인사를 임명하는 청문회를 보니 염라대왕의 셈법보다도 더 엄격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청문회를 보면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위반하고 실수하고 아파하는 것만 부각한다. 살면서 그가 자부심으로 생각했던 것에 오물을 끼얹기도 한다. ‘검증’이란 이름하에 기본적인 예의조차 무시하는 저런 청문회는 왜 하는 걸까. 나는 궁금하다. 살아온 날들이 다 죄라고 규정하는 그들을 그 기준에 따라서 청문회에 세우면 어떻게 될까.
사실은 장관이든, 헌재소장이든, 총리든 엄청난 자리다. 그 화려한 옷을 입게 되는 사람이 그 옷을 자기라 믿어버리면 자아팽창이 일어난다. 자아팽창이 문제인 것은 권력의 옷을 자기라 믿어버리고, 그 옷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국민”이라는 인식은 건강한 것이다.
직책이 단지 자기가 입은 옷일 뿐 자기가 아니라는 자각을 위해서도 오물을 뒤집어쓰는 자아축소의 경험은 통과의례로서 필요할 수 있겠다. 오물을 뒤집어쓴 내가, 내가 아니듯 관을 쓴 나도 내가 아니라는 자각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우리 청문회는 너무하다. 기본적으로 국민은 청문회를 통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철학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