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백합배·춘란배·삼성화재배…세계대회 일정 탓 개막 3주 만에 3주간 휴식기
기전들이 대거 사라진 상황에서 한국바둑리그는 국내 타이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정작 최고에 걸맞은 위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일요신문] 지난 6월 9일 오후 서울 마장로 한국기원 내 바둑TV 스튜디오. 생방송 중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KB한국바둑리그 3라운드 BGF리테일CU 대 화성시코리요전에서 CU 소속 이지현 6단이 대국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 이 상황은 규정에 따라 대국 개시 15분을 기다린 후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화성시코리요 송지훈 2단의 승리가 선언됐다. 화성시코리요는 그야말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격, 거저 1승을 올렸다. 5판 3선승제의 한국바둑리그에서 1승은 무척 크다.
그 시각 이지현은 멀리 중국 저장성 취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을조리그 현장에 있었다. 나중에 알아본 영문은 이랬다. 공교롭게도 한국바둑리그와 중국 을조리그 일정이 겹친 이지현은 대우가 나은 을조리그 출전을 위해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는 뜻을 한국기원 담당자에게 구두로 전했다. 이에 담당자는 소속팀 감독이 당연히 이지현을 제외한 오더를 제출할 것이라 생각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정작 선수와 담당자 모두에게 연락을 받지 못한 CU 백대현 감독은 이지현을 오더에 넣어 그 같은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대국 한 판 기권패 처리했다 하면 그만일 수도 있는 것(실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CU가 3-2로 승리했다)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국내 최고 기전이라는 KB한국바둑리그가 과연 최고 기전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재)한국기원은 최근 세계대회(몽백합배 본선, 춘란배 결승, 삼성화재배 통합예선) 일정 관계로 KB바둑리그가 3주간 휴식기를 갖는다고 발표했다. 지난 5월 18일 개막한 KB바둑리그가 개막 3주 만에 3주간의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바둑은 위기 상황이다.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수전이 중단된 지 2년이 넘었고 43년 전통의 명인전도 후원사가 후원을 포기해 중단된 상태다. 새로 생기는 속도보다 없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 남은 기전도 몇 되지 않는다. 과거 프로바둑을 대표하던 ‘도전기’와 ‘본선리그’라는 단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이며 제한시간 10분의 초속기 KBS바둑왕전을 빼면 출전이 제한된 제한기전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단발성 기전이 대부분이다.
한국기원은 이를 지적하면 우리에겐 총 규모 34억 원의 KB국민은행 바둑리그가 있다고 내세우지만 이 바둑리그가 과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리그를 중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단은커녕 메이저리그 소속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자국 리그를 우선시하고 팬들을 맨 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보름 동안 리그를 중단하거나 선수를 차출하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시 마찬가지다. 초창기 몇 안 되는 팀에 대규모 국가대표 차출로 불가피하게 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규모에 이른 이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리그 중단은 없다’고 못 박고 국내 리그를 우선시하고 있다.
한국바둑리그는 모든 매칭이 가능하다. 전설들의 대결 이창호-이세돌의 대국도 올해 있었다.
한국바둑리그는 어떨까. 6월 셋째 주 중국 갑조리그와 을조리그 때문에 리그 중단이 불가피하다고 한 것은 그렇다 치고 한국기원이 연기 이유로 지목한 몽백합배 본선과 춘란배 결승, 삼성화재배 통합예선 일정을 살펴보면 과연 연기 이유가 합당한지 의문이 든다.
몽백합배와 춘란배부터 보자. 몽백합배는 한국바둑리그가 열리지 않는 월요일과 수요일 열리고, 그 주 주말에 열리는 춘란배 결승전엔 박영훈 9단 혼자 출전한다. 이 경우 몽백합배와 한국바둑리그 출전이 겹치는 사람은 수요일 저녁이나 목요일 오전 중국에서 일찍 출발해 오후에 한국바둑리그를 소화하면 된다. 확률상 겹칠 경우도 몇 안 될 터. 설마 박영훈 9단 한 명 때문에 다 같이 한 주를 쉬자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삼성화재배 통합예선을 이유로 리그를 미룬 것도 마찬가지다. 삼성화재배는 6월 28일(수)부터 7월 3일(월)까지 일정이 잡혀있다. 매주 목~일요일 진행되는 한국바둑리그와 정면으로 겹친다. 때문에 통상 매년 쉬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기로만 마음먹는다면 이 역시 못할 바도 아니다. 이미 최정 7단은 삼성화재배보다 제한시간이 긴 LG배 통합예선을 치르고 당일 저녁 여자바둑리그까지 더블헤더를 치른 경험이 있다. 그것도 2년 연속이나 말이다. 최정 본인도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니 못 둘 것도 없다’고 했었다. 오전 삼성화재배와 한국바둑리그 출전 일정이 겹치는 기사가 몇이나 될까. 설사 겹친다 해도 많은 숫자가 아니고 어쩌다 한 판일 텐데….
바둑계 한 관계자는 “절차상 문제는 있었지만 이지현 6단의 중국 을조리그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다. 프로인 이상 대국료가 많은 쪽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국내리그보다 중국리그 출전을 당연시하고, 타 기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한국바둑리그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스폰서인 KB국민은행 측에 결례인 것은 물론 국내 최고라는 한국바둑리그는 존중받지 못하고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바둑리그가 3주 만에 재개되는 7월 6~7일은 제19회 농심 신라면배 통합예선 1회전과 2회전이 열리는 날. 리그 중단 한 달을 채우긴 미안했을까. 다행히 7월 첫째 주는 한국바둑리그가 치러진단다. 다만 주최측에 원칙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는 묻고 싶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