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거부증 가능성두고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상상임신’이란 임신을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임신했다고 믿고, 유사한 임신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소화불량을 입덧이라고 믿거나 복통을 태동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반대 개념인 임신거부증에는 그렇다 할 증상이 없다.
책 <나는 임신하지 않았다>에 소개된 사례 중 대부분의 여성들은 입덧, 태동 모두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기간에는 배가 나오고 월경도 멈추는 것이 정상인데, 임신거부증에 걸린 여성들은 배가 부르지도 않고 월경을 하기도 한다. 임신거부증이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임신 사실을 회피하려는 일관된 방어기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태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임신을 원치 않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태아는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자각한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유산이나 낙태를 할까 봐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그렇기 때문에 자궁은 비정상적인 모양으로 늘어나 임산부의 배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덜 나오고, 월경도 정상적으로 한다. 태동도 없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 임신이라는 것은 축복이고 행복의 시작이다. 하지만 임신을 원치 않는 여성에게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고 불행일 뿐이다. 임신거부증은 그런 여성에게 찾아온다. 임신거부증에 걸린 여성들 대부분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문제는 출산 직후다. 여성이 임신 기간 내내 임신거부증을 앓았다면 출산 직후에 무의식적으로 영아를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에게 예상치 못한 신생아란 불청객이기 때문이다.
영아살해자에 관한 일부 연구 논문은 임산부가 임신을 하고도 자신의 임신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적어도 임신 20주까지 임신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 없었다는 주장에 따라 임신거부증이 영아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세의 한 여성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어느 날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임신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임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했다. 결국, 아무런 준비 없이 지내다가 집 화장실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했고, 아이가 숨질 때까지 방임했다가 비닐봉지에 사체를 넣어 창고에 숨겼다. 이 여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엄한 부모님 아래 조용한 성격으로 자랐고,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야단과 체벌을 많이 받아왔다.
이 사례처럼 임신거부증은 일반적으로 가족, 주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불안정한 심리 상태인 여성에게 주로 일어난다. 또, 영아를 살해하는 친모의 특성은 보통 어린 나이로 감정적으로 미숙하고 미혼이며 직업이 없거나 학생이다. 출산하는 순간 아빠가 없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병원이 아닌 곳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 따라서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미숙하게 대처해 충동적으로 살해를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김경민 단국대병원 정신의학 교수에 따르면 신생아를 살해하기 전의 스트레스 요인은 임신을 감추어야 하는 것(95%)과 출산 시 부모의 반응에 대한 걱정(73%)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즉, 아기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생명이었기 때문에 신생아를 살해하는 것이다.
2006년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은 친모 베로니크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온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그는 ‘임신거부증’으로 밝혀졌다. ⓒ연합뉴스 2006.10.12
2006년 대한민국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을 계기로 임신거부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당시 서래마을에 살던 프랑스인 부부가 자신의 아이 둘을 숨지게 하고 3~4년간 냉동실에 보관했다. 이 부부는 처음에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발표 후 아내 베로니크 쿠르조 씨는 “남편 몰래 이란성 쌍둥이를 낳은 뒤 살해했다”고 범행을 인정했다.
베로니크 씨는 프랑스 경찰 조사에서 “남편 몰래 한 단독 범행”이라고 말해 듣는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남편이 모르는 게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하냐는 의문에서다. 하지만 그들의 컴퓨터에서 복구된 사진 등 베로니크 씨의 임신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베로니크 씨의 친구들 역시 임신 사실을 눈치챌 수 없는 내용의 진술을 하며 남편 장 루이 쿠르조 씨가 임신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지난 17일 부산 대연동의 한 가정집 냉동고에서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됐다. 아이의 친모 김 아무개 씨(34·여)는 20014년 병원에서 출산한 뒤 자신의 원룸에 데려왔으나 제대로 돌보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는 “아기를 키울 여력이 안 돼 이틀간 방치했고 결국 숨져서 냉동실에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2016년 욕실에서 샤워하다가 또 한 번 아이를 출산했지만, 출산 직후 기절했다가 새벽 2시에 깨어난 그는 아기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냉동실에 넣었다.
이번 사건은 앞서의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과 닮아있다. 김 씨가 출산을 원치 않았던 점, 임신했음에도 동거남이 임신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점, 출산 직후 영아를 살해하고 유기했다는 점을 두고 그 역시 임신거부증에 걸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아이를 샤워실에서 출산한 것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이 어렵다. 이는 김 씨가 아이의 출산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임신한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때문에 이런 점에서 김 씨의 임신거부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물론, 표면적 정황만으로 임신거부증을 예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김 씨가 본인의 임신 사실을 인지했는지 여부도 명확치 않다. 김경민 단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 교수는 “피의자들의 심리내적 상태에 대해 구체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임신거부증의 판단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문일 동탄제일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김 씨의) 임신거부증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2011년 프랑스 통계에 따르면 출산 1000건 가운데 임신거부증 사례는 1~3건이다. 프랑스의 출산 건수가 80만 건이라면 임신거부증은 연간 800~2400건에 이르는 셈이다. 물론 모든 임신거부증에 걸린 임산부들이 모두 신생아를 살해하는 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임신거부증은 예방되고 치료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영아살해를 방지하기 위해 산모뿐만 아니라 산모의 가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의 경우, 우리나라는 베로니크 씨를 단순 살인범으로 몰아갔지만, 프랑스에선 임신거부증이라는 정신질환을 받아들여 법과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베로니크 씨는 법정에서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4년 만에 가석방됐다. 이후 그의 남편은 <그녀를 버릴 수가 없었다>는 책을 내고 “임신거부증에 걸린 여성들은 대화가 전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임신거부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을 대변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