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참아라” 2년간 고통 속에…
천안 서북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A 양(12)은 2015년부터 B 군(12)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A 양은 “처음엔 짧은 옷을 입고 있으면 옷 안을 들여다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강도는 세지고 잦아졌다. ‘만져 버린다’며 주무르는 손 모양을 취하기도 했다. 가슴, 엉덩이, 허벅지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앉아있는데 은밀한 곳까지 대놓고 만졌다”고 말했다.
이를 알아챈 A 양의 엄마(43)는 지난 4월 18일 오전 8시 30분쯤 담임에게 딸의 불만을 이야기했다. 학교는 한 달쯤 지나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었다. 학교는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로 구성된 학폭위를 개최해 사건을 조사·심의해 조치한다.
# 16명으로 늘어난 피해자
지난 5월 15일 열린 학폭위에서 B 군은 1호 조치인 ‘서면사과’ 처분을 받았다. 학폭위는 학교폭력의 심각성에 따라 1호부터 9호까지 조치한다. B 군의 학교폭력은 심각하지 않고 지속되지도 않았으며 고의성 역시 없었다고 판단됐다. 최소 7호인 ‘학급 교체’를 기대했던 A 양의 부모는 솜방망이 조치 이유가 궁금했다. 학교에 ‘학폭위 회의록’ 공개를 요청했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르면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가족은 회의록을 받아 볼 수 있다.
학교는 회의록 내용을 축소 공개했다. A 양 부모의 첫 공개 요청에 “비공개라 줄 수 없다”고 했다. 법을 근거로 재차 요청하자 학교는 지난 5월 18일 축소된 회의록을 내놨다. 회의록에는 ‘심의’ 내용이 빠져 있었다. 학폭위 회의록은 보통 사안보고와 피해·가해학생 질의응답, 심의, 의결 등 4단계로 이뤄져 있다. 의결만 가지고 학폭위의 판단 근거를 알 수 없었던 A 양의 부모는 심의 내용을 포함한 회의록을 또 다시 요청했다.
천안교육지원청 이 아무개 장학사 역시 공개 거부 입장을 취했다. 충남교육청과 교육부가 A 양의 부모에게 “공개하는 게 맞다”고 했는데도 이 장학사는 공개를 거부했다. A 양의 부모는 또 다시 항의했다. 이 장학사는 10일 넘게 지나서야 충남교육청 담당 변호사 조언을 토대로 심의 내용 4장이 복원된 회의록을 지난 5월 29일 공개했다.
학교 교감은 “학부모의 1차 요청 때 천안교육지원청에 문의했다. 지원청은 ‘심의 내용을 뺀 뒤에 주라’고 했다. 2차 요청이 들어와서 다시 지원청에 문의했더니 충남교육청 변호사 자문을 받고 그제서야 ‘심의 내용도 주라’고 했다”고 해명했다.
사건 축소는 학폭위 과정에서 더 드러났다. 담임은 학폭위에 앞서 성추행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학생들을 막아섰다. 지난 4월 18일 수학여행을 준비하던 A 양과 친구들은 “5학년 수련회 때처럼 또 만질까 두렵다. B 군에게 당한 피해자들에게 설문을 받아 심각성을 알리자”며 설문지를 만든 뒤 돌렸다.
16명째 피해학생이 서명을 하고 있는데 담임이 아이들의 설문지를 가져갔다. A 양은 “담임이 ‘이런 일은 쓸모가 없다. B 군을 매장시키려는 거다. 너희는 따돌림 가해자가 된다. 게다가 이건 증거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더라”라고 했다. 담임은 “이런 설문조사가 가해학생을 왕따로 만들 수 있다고는 했지만 그 외에는 말한 적 없다. 빼앗지도 않았다. 나중에 돌려줬다”고 반박했다.
A 양에 따르면 A 양의 4학년과 5학년 때 담임들도 현재 담임과 별 다를 바 없었다. A 양은 “두 담임 다 ‘너희가 B 군을 따돌리는 거다. 남학생이니까 그럴 수 있다. 참아라’라는 식으로 가해학생을 두둔했다”고 전했다. 둘은 현재 군 복무 중이다.
# “장애가 있으니 이해하라”
A 양 부모는 심의 내용이 추가된 회의록을 보고 B 군이 받은 조치가 애초 3호 ‘교내 봉사활동’에서 가장 낮은 조치인 1호인 서면사과로 경감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해학생의 ‘경계선 발달장애’와 ADHD 약 복용 때문이었다. ADHD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일컫는 의학용어다. A 양 부모는 “학폭위는 가해학생 신체가 피해학생을 비롯 여학생들의 신체에 닿았지만 가해학생이 경계선 발달장애를 가졌고 ADHD 약을 복용한다는 이유로 조치를 경감했다“고 말했다.
학폭위의 판단 근거는 가해학생 엄마의 ”아이가 경계선 발달장애를 겪고 있다. ADHD 약을 복용 중“이라는 발언이었다. 학교와 학폭위는 가해학생 엄마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충남교육청이 지난 5월 26일 확인한 가해학생의 정확한 상태는 ‘지적장애’와 ADHD 특성 중 하나인 ‘과잉행동장애’였다. 경계선 발달장애란 진단은 의학계에 아예 없는 단어다. 물론 가해학생 엄마가 용어를 헷갈렸을 수 있다. 하지만 가해학생 엄마는 학폭위에서 ”우리 아이는 지적장애가 아니다. 경계선 발달장애“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학교 측은 아직까지도 가해학생의 상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감과 교사들은 지난달 26일 <일요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가해학생은 경계선 발달장애를 겪고 있어서 이 조치가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 지적장애와 ADHD는 성범죄 면죄부?
지난달 13일 충청남도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충남학폭지역위)는 피해학생 부모의 재심 신청을 물리쳤다. “지적장애와 과잉행동장애로 가해학생의 고의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교폭력은 교내에서 열리는 학폭위가 1차로 조치한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쪽은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에 2차로 재심을 신청할 수 있다.
학교와 충남교육청에서 각각 있었던 학폭위의 판단과 달리 정신과 의사들은 지적장애와 ADHD는 성범죄의 면죄부가 되기 힘들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요신문>이 만난 정신과 의사 4명은 입을 모아 “지적장애는 보통 성적인 부분보다는 조울증·우울증 등 정신과적 질환이 동반되는 경향이 짙다. 자폐가 아니라면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더라도 행동에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ADHD가 그나마 가해학생의 충동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다만 ADHD는 보통 반항장애·품행장애·우울장애·물질남용 등으로 표출된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가해학생의 학부모와 학교의 잘못된 훈육을 지적했다. 의사 4명은 “가해학생의 행동은 병보다는 잘못된 훈육의 가능성이 높다. 성 인식 교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언제 이 아이의 성적 행동이 문제라고 인지했었는지가 중요하다. 학교와 부모가 가해학생의 행동을 인식하고 충동 조절력을 어떻게 보완하고 대비했었는지가 핵심이었다”고 전했다.
A 양과 그의 부모는 충남학폭지역위의 재심 기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A 양은 “B의 추행은 점점 교묘해진다. 의도성이 보인다. 게다가 서면사과 뒤에도 또 다시 날 만졌다”고 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