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 없는 박근혜가 이재오를 부른다
▲ 2년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대표와 얼굴을 만지고 있는 이재오 원내대표의 모습. 최근 박근혜 전 대표의 유세 보이콧이 입방아에 오르면서 친이 측의 거센 불만을 낳고 있다. | ||
물론 이번 박 전 대표의 유세 보이콧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그룹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자업자득’이라는 반응이 많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가 이번 재·보궐 선거 지원 유세뿐 아니라 최근의 금융위기에 대해서도 정부의 ‘신뢰론’만을 언급할 뿐 구체적인 대안 제시를 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당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의 이러한 ‘쌀쌀맞은 외면’이 부메랑이 되어 박 전 대표 자신을 압박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번 재·보궐 선거 과정에서 박 전 대표와 완전히 척을 진 친이그룹이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을 추진해 친박그룹을 압박할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불고 있는 ‘박근혜 비토론’의 실체를 추적해봤다.
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당원이 맞기는 맞나. 같은 당 당원이 선거에서 저렇게 애타게 찾는데 눈길도 주지 않으니 말이다. 유세차 앞뒤에 박 전 대표 사진만 잔뜩 붙이고 다니는 게 너무 안쓰럽더라. 대권 야망에 눈이 어두워 당과 국가의 위기를 모른 체한다면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앞으로 선거가 많이 있을 텐데 그때도 지금처럼 한다면 당내 불만이 정말 극에 달할 것이다.”
한나라당 친이그룹의 한 핵심 의원은 지난 10·29 재·보궐 선거를 며칠 앞두고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그동안 쌓인 불만을 기자에게 강도 높게 토해냈다. 사실 그가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박희태 대표와 당 지도부는 지난 6·4 재·보궐 선거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 선거에 중앙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당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가 전국 선거도 아니고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도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의 상징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최근의 금융위기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이번 재·보궐 선거의 참패라는 결과로 나타날 경우 ‘연말 개각설’ 등이 탄력을 받아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당 지도부는 선거 초반부터 당력을 집중했다. 작은 선거이긴 해도 패배하면 청와대는 물론 박희태 대표의 리더십마저 휘청거릴 수 있는 ‘계륵’ 같은 선거가 이번 재·보궐 선거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선거 여제’로 통하는 ‘박근혜 전 대표 역할론’도 커져갔다. 특히 충남 연기 등 한나라당 열세 지역을 두고서는 “정부 여당의 인기가 바닥인 상황에서 그나마 선거를 이기려면 박근혜 전 대표가 유세를 해줘야 한다”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박 전 대표 측 눈치만 보다가 선거가 임박해서야 박 전 대표에게 ‘SOS’ 사인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선거 며칠 전 여론조사에서 영남지역마저 위험하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어떻게든 선거에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던 당 지도부의 기대는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친박그룹 소속 허태열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의 지원 유세와 관련해 “선거 때마다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정권적 차원에서라면 모르겠지만 군소 선거까지 연설하고 다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친이그룹 핵심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어느 당 소속이냐. 정말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다”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박 전 대표의 유세 보이콧은 친이그룹의 자업자득 성격이 짙다. 한 소장파 의원은 이에 대해 “정권 바뀌고 언제 박 전 대표 측 인사들에게 정부나 공기업의 변변한 자리 하나라도 권한 적이 있느냐. 그러면서 이럴 때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봐도 염치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로서도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이번 선거에서 미리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당내 최고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급할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이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스스로 찾아와 ‘도와 달라’는 최후의 메시지를 보내며 무릎을 꿇을 때 박 전 대표의 진가는 빛을 발할 수 있다. 친박그룹 내부에서는 그 시기가 2010년 지방선거 아니면 그 후인 2012년 총선까지도 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에게 있어 한나라당 최후의 백기사가 될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다. 그 천금 같은 기회를 통해 친이그룹의 견제를 뚫고 당의 대권주자로 올라서야 하는 입장이다.
만약 박 전 대표가 건곤일척으로 던진 승부수가 실패로 끝날 경우 그의 정치적 생명도 위험해진다. 지금으로선 앞으로 남은 두 번의 큰 선거가 그 시험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때 청계천 복원사업의 성공을 지렛대 삼아 단번에 유력 대권주자로 올라섰듯이 박 전 대표도 앞으로 남은 큰 선거를 모멘텀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년 4월·10월의 ‘작은’ 재·보궐 선거에서도 박 전 대표의 지원 유세 차량을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울주군수 재보궐선거 지원유세에 나선 박희태 대표. 연합뉴스 | ||
이런 ‘박근혜 비토’ 분위기는 친이그룹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중립성향의 한 비례대표 의원은 이에 대해 “국민들에게 신뢰도가 높고 영향력이 가장 큰 정치인이 바로 박 전 대표 아니냐. 최근의 경제위기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민 간의 신뢰 위기로 인해 더 심화되고 있다고 본다면 국민들의 신뢰가 깊은 박 전 대표가 나서서 그 중재자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신뢰의 위기’라는 지적이 많다. 그런 점에서 현 정권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의 신뢰도를 회복시켜 준다면 금융위기의 조기 해소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지금은 최악의 경제위기다. 이런 위기에서 박 전 대표가 뒷짐만 지고 있는 것도 그리 책임 있는 대권주자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박 전 대표는 앞서의 대통령 협조 문제와 관련해 “국가 현안에 대해 세세하게 언급하다보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겠다”라며 최대한 신중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훈수’ 한마디에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배려에서다. 그래서 한나라당 내부에선 “친이그룹도 반성해야 한다. 그동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주지 않고 위기가 닥쳤을 때 부랴부랴 박 전 대표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정도는 아니다”라는 반응도 많다.
한나라당이 선거 때만 되면 지나치게 박 전 대표에게 의존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박 전 대표가 대중적 인기가 있긴 하지만 그 ‘약발’이 언제나 통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4·9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에만 머물던 박 전 대표는 이례적으로 최측근이었던 강창희 전 최고위원에 대해서는 직접 지원 유세까지 했지만 패한 바 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선거의 여제’라는 이미지에도 일정 부분 생채기를 남겼다. 이번 재·보궐 선거도 마찬가지다. 금융위기와 재·보궐 선거 여당 연패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한나라당은 울주군수 선거에서는 역전승을 거두었고, 연기군수 선거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한 바 있다.
이런 점을 두고 당내 일각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어린아이 젖 물릴 곳 찾는 것처럼 박 전 대표만 찾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이번 선거에선 박희태 대표가 나름대로 선방했다. 박 전 대표가 대중적 인기가 높긴 하지만 그가 아니면 못 이긴다는 식의 패배의식은 옳지 못하다. 차라리 박 전 대표 없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하나라도 더 짜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주장도 나온다. 여권 일각에서는 “비록 규모가 작긴 했지만 이번 재·보궐 선거를 통해 ‘박근혜 없는 선거’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걷어낸 것 같다”라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
이런 친이그룹 내부의 ‘자신감’과 박 전 대표의 지원 유세 보이콧 행보는 양측 간 감정을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긴장감을 고조시켜 향후 더욱 치열한 세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친이그룹은 사실 이번 선거에서 박 전 대표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가 일언지하에 지원 유세를 거절하자 양측 관계 악화의 장본인이 바로 박 전 대표라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만들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잠잠해있던 양측 간의 갈등을 다시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선거 비협조 때문에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을 앞당기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고 전제하면서 “친이그룹은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박 전 대표의 비협조 행보를 구실로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박 전 대표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상 우리도 더 이상 물러서면 안 된다. 이 전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친이그룹 사이에서 더욱 강하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중립성향의 의원들도 양측이 줄서기를 강요하는 등 당내 계파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친이그룹과의 관계를 너무 비타협적이고 대립적으로만 설정해 자신들 스스로를 당내에서 고립시키고 있다”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물론 친박그룹은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서 호되게 당한 바 있고 현 정권 출범 뒤에도 권력 핵심에 진입하지 못하는 등 철저하게 비주류의 설움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특정 사안에 대해 일정 부분 친이그룹에 협조하는 유연한 행보를 보여주었다면 권력의 지분을 따내는 실익과 위기에 협조한다는 명분을 동시에 챙길 수도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나타난 친이그룹과 친박그룹의 긴장 관계는 결국 지난 2007년 당 대선후보 경선 이후 꾸준하게 노정돼온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의 자존심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누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굴복’할 것인가. 국가를 이끌어가는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에 경제위기의 해결도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냉정하게 손익계산서를 따져볼 때가 된 것 같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