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쏜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을 때였다. 전국적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권을 잡은 핵심들은 불안했다. 대법관들에 대한 그들의 회유와 압력이 있었다. 대법원에서 신속하게 사형이 확정되고 관련된 대법관들의 운명이 엇갈렸다. 소신을 나타낸 대법관들은 모두 그 직을 박탈당했다. 반면에 사법부의 수장이 된 분도 있었다. 그분의 운명 역시 끝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한강다리 위에서 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부하여서는 안 된다. 나는 30년 전 대통령 직속기관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대법원장의 임기종료를 앞두고 후임 대법원장 후보 두 명에 대한 평가 작업을 옆에서 봤다. 한 분은 깊은 법률적 지식과 함께 작은 교통사고 하나도 남몰래 현장에 가서 확인하며 고민하는 강직한 대법관이었다. 다른 한 분은 정치권력과의 소통에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더러 청탁도 들어주고 남에게 부탁도 자주 했다. 심지어 그는 정보기관에 사적인 부탁도 했다. 그런 청탁은 공짜가 아니다.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재판을 흔들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대법원장 후보에 대한 옐로카드를 작성하는 상관에게 물어보았다. 후배판사들에게 신망이 있는 분이 대법원장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말을 듣자 상관은 “너는 말 잘 듣는 놈을 시키고 싶겠냐, 아니면 안 듣는 놈을 시키고 싶겠냐”라며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대법원장 자리는 대통령과 코드를 같이 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판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제를 지키는 도구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전국의 법관들이 모여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는 대법원장에 대해 항의하는 회의를 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판사들의 요구인 것 같다. 얼마 전 대법관추천회의에 위원으로 참여한 대한변협 회장을 만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위원장이 대법원장의 뜻을 살피기에 바쁘더라며 그게 무슨 회의냐고 했다. 대법원장이 다 결정하고 회의는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전과 같이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재판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더러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 권력구조에 대한 견제를 드러내는 좋은 판결문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법관들이 승진과정에서 발탁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례가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법관들의 마음에 ‘좋은 게 좋다 대세를 따라가자’는 패배의식이 스며들 가능성이 커질지도 모른다. 대법원장의 임기가 몇 달 안 남았다. 후임 대법원장은 잘 뽑아야 한다. 사법부와 대통령의 관계가 우리 법치주의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