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평생은 신앙 같은 행정 관료의 외길인생이다. 그렇다고 출세주의자도 아니고 꽉 막힌 공무원도 아니었다. 주변에 누가 힘든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도와주는 스타일이었다. 절대로 그 댓가나 인사치레를 받지 않았다. 그는 도와달라는 사람을 뿌리치지 않고 그렇게 하나하나 관료의 삶을 그물같이 짜나갔다.
친구는 젊은 시절부터 내게 말했다. 그렇게 주변에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덕을 쌓아가는 게 최고의 출세철학일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부이사관으로 있을 때였다. 한번은 그가 내게 참치통조림 세트 40개만 사달라고 부탁했다. 명절인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부하들에게 밥을 사거나 선물을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차관을 마치고 나오면서 스스로 노력해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갔다면서 자족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까 함께 궁리하기로 했다. 그 며칠 후였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가 장관으로 지명됐다는 뉴스를 봤다.
“너, 대통령과 잘 아는 사이냐?”
그를 만나서 내가 물었다.
“아니 전혀 몰라. 차관을 했으니까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
“대통령의 수첩에 있거나 정치권에 기웃거려야 하는데 누가 너를 장관으로 추천했냐?”
“남들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쑈를 한다고 그러는데 나도 정말 모르겠어. 대통령과 나중에 개인적인 말을 할 기회가 있으면 나도 물어보고 싶어. 궁금해”
그가 평생 쌓아온 것에 대한 보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관을 하겠다고 수십억을 바쳤다는 인물들도 있었다. 그는 진짜 장관다운 장관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깨끗하고 때 묻은 정치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그가 장관을 그만 두었다. 어느 날 내가 물어보았다.
“장관을 하니까 재미있었냐?”
“국무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이게 회의인지 아닌지 정말 모르겠다. 대통령은 누가 써준 원고를 읽고 장관들은 수첩에 모범생같이 줄줄이 메모하고 있는 거야. 그거 나중에 녹취록이 다 배포되는데 왜 그런지 몰라. 나는 쓰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대통령의 눈과 마주쳤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아 움찔하는 기분이었지. 그런 분위기가 이상한지 내 옆에 있던 장관이 말끝에 ‘이게 회의입니까’라고 묻더라구. 갑자기 국무회의 분위기가 썰렁해졌지. 나하고 그 장관하고 둘이서 제일 먼저 잘렸어.”
친구는 장관을 그만두고 요즈음 제2의 인생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사회복지시설을 돕기 위해 열심히 왕년의 비서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치꾼보다 친구 같은 순박한 전문직 장관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