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발생한 옥시사건아시죠? 영국본사를 대리해서 찾아왔습니다.”
가습기첨가제가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쳐 어린아이나 병을 앓는 사람들이 여러 명 죽은 사건이다. 사회문제를 넘어 이미 국회에서 정치화한 사건이었다. 환경단체와 언론이 들고일어나고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영국 본사를 찾아가 사장을 만나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찾아오신 이유는 뭡니까?”
내가 물었다. 이미 대형로펌에서 사건을 맡아 소송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옥시 본사에서는 펀드를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금이 공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보상위원회를 만드는 데 그 위원장이 되어 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거센 감정적인 여론의 물결의 타켓이 되는 게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적으로 단정이 되면 조리돌림을 당하고 침몰하는 세상이었다. 나는 일단 대리인의 뒤에 있는 영국인들이 운영하는 본사의 생각과 진정을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대리인이 아니라 영국의 본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의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영국본사의 사장이 움직일려면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사회의 회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영국 본사의 이사회에서는 사장이 한국으로 가면 위험하니까 가면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게 멀리서 솜털조차 다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직접 와서 하는 말을 듣기 전에는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우회해서 사유를 들어 거절했다. 일주일쯤 후에 잘생긴 백인이 영국계 컨설턴트 회사 사장과 함께 사무실을 찾아왔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옥시 본사를 위해서 일하는 변호사라고 했다. 사장대신 이사회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왔다고 했다. 그가 온 게 의외였다.
“협상현장을 한번 돌아봤습니까?”
내가 영국인에게 물었다. 옆에 있던 영국계 컨설턴트 회사 사장이 입을 열었다.
“상황을 알아보고 옥시본사에 보고하기 위해 참여했었습니다. 환경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려는 분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무엇을 추구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합의가 안 되게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분들의 마음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할까요?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는 것 같았어요. 더 무책임한 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교수들이었습니다. 위자료를 칠 억원쯤 줘야 한다고 발언하면 하루아침에 요구액이 달라지는 겁니다. 영국인들과 한국인들은 마인드가 너무 다른 걸 느꼈습니다.”
“영국인들의 마인드는 어떤 겁니까?”
나는 영국변호사에게 물었다.
“회사의 생산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배상을 할 펀드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펀드를 운영할 보상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피해현실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을 합니다. 그 책임이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회사의 청산절차를 하고 끝내 버립니다. 회사를 계속할 때는 다시 신규회사를 설립해서 경영을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옥시본사에서는 적절한 보상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치문제화 해서 오히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 보상이 되지 않게 하는 걸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여론이 들끓고 정치문제화 된 한국의 정서에서 영국본사측이 배경에 있는 보상위원장은 감정적으로 전 국민의 돌을 맞을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걸 알고 제시하시는 건가요? 도대체 그런 파멸에 대해 어떤 보상을 할 수 있나요?”
나는 한편으로는 그들과의 사고의 차이가 궁금하기도 했다.
“위원장을 하시는 데 대한 댓가는 원하시는 대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엄청나게 통이 큰 소리라는 것 같았다. 금액에는 구애되지 않는다는 영국인의 표정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영국계 컨설턴트 회사 사장이 덧붙였다.
“그동안 저희측도 솔직히 위원장을 하실 분을 알아봤습니다. 보수를 얼마나 주겠느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었고 노이지 마케팅이라도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으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위원장 자리 그걸 보고 하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서와 영국인의 정서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우리의 분노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여론 역시 여러 어린생명의 죽음을 수학적인 공식에 의해 금전으로 환산하는 그들의 마인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들의 피 위에서 정치를 하려는 꾼들의 방해를 막기도 힘들 것 같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철길 같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사회에서 보상협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위원장자리를 거절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