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진압군 격려노래 부르는 과거 사진 한 장 때문에…호된 영부인 신고식
중국 천안문사태 때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계엄군 앞에서 격려노래를 부르는 젊은 시절 펑리위안의 모습이 1989년 어느 잡지에 실렸다.
1962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펑리위안은 어릴 적부터 예술적 재능을 드러냈다. 14세 때 산둥예술학교에 들어간 펑리위안은 졸업 후 1980년, 18세의 나이에 인민해방군에 들어간다. 군에서 노래 솜씨를 인정받은 그녀는 곧 위문 공연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베트남과의 분쟁 지역에서 중국군을 위해 노래하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1982년엔 결정적 계기가 왔다. CCTV(중국중앙방송)의 설 특집 프로그램에 나간 펑리위안은 ‘희망의 들에서’(在希望的田野上)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후 그녀는 중국을 대표하는 ‘인민 가수’가 된다. 산둥성의 상징이 모란이기에 ‘모란의 요정’이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고, 1986년엔 CCTV 주최 가요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일반적인 대중 가수와는 달랐다. 군인으로서 대부분 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노래를 불렀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서 선전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1986년 24세였던 펑리위안은 한 남자를 만난다. 친구의 소개였다. 33세로 펑리위안보다 9살 많았던 시진핑은 당시 푸젠성 샤먼의 부시장이었다. 그녀는 미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샤먼으로 갔다. 흥미로운 건 당시 시진핑은 펑리위안이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며 “그래도 ‘희망의 들에서’는 들어본 것 같은데 참 좋더군요”라고 말하는 시진핑의 순박한 모습에 펑리위안은 끌렸고, 그녀가 가수 이전에 현역 군인이라는 점에 시진핑은 호감을 가졌다.
사실 시진핑은 재혼이었다. 첫 아내 커사오밍은 외교관 커화의 딸이었는데, 영국에서 살기를 고집했고 결국 두 사람은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4년 동안 홀로 지내던 시진핑은 펑리위안과 재혼했다.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시진핑이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의 아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평범한 집안이었던 펑리위안의 부모는 고위직 가문에 시집 간 딸이 시달리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자신이 모든 걸 감당하겠다고 처가를 설득했고,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한다.
이후 펑리위안은 승승장구했다. 1990년엔 민족음악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 이 분야 최초의 학위였다. 2002년엔 인민해방군 소장(한국으로 치면 별 하나인 준장에 해당)이 됐다. 2005년엔 미국 링컨센터에서 오페라 분야 예술가상을 받았다. 2009년엔 인민해방군 가무단 단장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2013년 시진핑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과 펑리위안. EPA/연합뉴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뿌려놓은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중국 사회에서 ‘영부인’은 되도록이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펑리위안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남편 못지않게 외교적 역량을 담당했다.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군인 겸 가수로서 오랜 기간 동안 국가에 충성했던 경력의 연장이었다. 이때 사건이 터졌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덩샤오핑 치하에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는 민주화의 열망을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천 명의 인명을 앗아가며 짓눌렀던 사건이었다. 국제 사회는 당시 중국의 잔인한 진압에 대해 높은 강도의 비난을 퍼부었고, 사실 이 사건은 아직도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공개된 사진에서 펑리위안은 군복을 입고 민중을 학살한 계엄군 앞에서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89년 어느 잡지에 실린 사진이었는데, 쑨리라는 기자가 발견하고 ‘영부인의 과거’라는 식의 콘셉트로 가십처럼 웨이보에 올렸다.
<타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고, <포브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국제무대에 급부상하던 펑리위안에게 이 사진은 치명적이었다. 시진핑이 개혁을 내세웠고 펑리위안은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보여주며 힘차게 시작하던, 새로운 정부의 깨끗한 이미지에 타격을 준 것이다. 특히 펑리위안의 대외 외교 활동에 부정적 역할을 미칠 가능성이 컸고, 중국 정부는 곧바로 삭제 조치에 들어갔지만 이미 전 세계에 퍼진 상태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재능이 뛰어났던 펑리위안은 18세에 인민해방군으로 들어가 중국을 대표하는 ‘인민가수’로 활약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의 과거가 소환되었다. 사실 펑리위안은 이전에도 국가적 이익과 선전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종종 사용했다. 시진핑이 부주석이던 2009년엔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 20주년 기념식에서 일본 노래인 ‘사계의 노래’를 불러 왕가의 뜨거운 찬사를 받은 바 있었다. 남편의 외교를 돕는다고는 하나,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 감정을 감안하면 다소 파격적인 일이었다. 2007년엔 티벳 복장을 입고 과거 중국 해방군의 티벳 점령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인권 단체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천안문 학살을 저지른 군인들을 격려하는 그녀의 과거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주체적인 여성의 롤모델처럼 여겨졌던 그녀는,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문제엔 눈감은 채 오로지 명령을 따라 재능을 소모하는 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동정론도 있었다. 군에 속해 있는 입장에서 그 명령을 거역하긴 힘들었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퍼스트레이디로서 급격히 미화되던 펑리위안의 변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건이었다. 공산당과 군대에 세뇌 당한 군인?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위상을 확립한 여성? 영부인 1년차 시절, 펑리위안은 호된 검증을 받아야 했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