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 같은 한국인 선생님 “환영합니다”
북서부 깔레이 마을의 작은 공항으로 한국 선생님이 도착했다.
[일요신문] 미얀마 북서부 깔레이(Kalay)의 작은 공항입니다. 우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우산을 펴들고 우리 일행은 양곤에서 오는 비행기를 기다립니다. 하루에 한 번 오는 비행기입니다. 비행기 도착시간이 자꾸 늦어집니다. 멀고 먼 이 마을에 오늘 한국에서 여자 선생님이 한 분 오십니다. 얼굴도 사진으로만 본 분입니다. 이곳 깔레이는 샤가잉구(Sagain Division)이지만 북부 친주(Chin State)를 드나드는 관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북부의 친주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양곤에서 고속버스로 22시간 걸리는 곳입니다. 이곳에 한국어와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교육브랜치가 세워졌습니다. 이른바 ‘찾아가는 교육’이 시작된 것입니다.
양곤이 고향인 교사 떼떼(앞)가 학생과 함께.
이 다리를 건너면 친주. 멀리 짜웃다롱 마을이 보인다.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저희 NGO 본부에서 미얀마에 오길 소망하는 한 분이 있어 한국에서 미팅을 가졌다는 소식입니다. 그분은 교육일선에서 줄곧 일해온 싱글인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일하던 곳에 사표를 내고 처음 미얀마로 오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막 활주로에 안착하고 상기된 모습의 떼떼 앞으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다가옵니다. 최 선생님입니다. 여자분인데 짐도 별로 없습니다. 떼떼가 환하게 웃으며 한국말로 인사를 합니다. 떼떼는 한국어과 출신은 아니고 독학을 한 학구파입니다. 홀로 이 낯선 곳으로 온 한국 선생님. 우리 모두 마음이 찡해집니다. 첫인상에서 이분은 아주 밝고 명랑한 분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북부 깔레이에서 떼떼의 야간수업.
미얀마 구석구석 마을에는 영어국제학교, 일본어교육센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언어가 나중 문화와 경제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깔레이는 인구가 적은 도시지만 800여 명의 초중고 학생들이 다니는 국제학교도 있습니다. 영어로 공부합니다. 우리는 이곳에 한국인과 미얀마인이 함께 가르치는 한국어학당을 시작했습니다. 떼떼와 리안, 그리고 새로 오신 최 선생님이 이 일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제 떼떼에겐 큰 언니 같은 선생님이 곁에 있습니다. 한국 선생님이 이 나라에 적응하기까진 시간이 걸리겠지요. 음식도 맞지 않고 더위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또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도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트렁크 하나 끌고 우리 곁으로 온 ‘독립군’ 같은 여선생님. 우리는 며칠 전 선생님이 지낼 방을 뜰이 보이도록 안쪽에 만들고 침대를 꾸미고 모기장도 쳤습니다. 저도 처음 이 나라에 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배낭 하나만 메고 왔습니다. 공항에 처음 얼굴을 보는 두 사람의 젊은 선생님이 나왔습니다. 그 후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교사 떼떼는 대도시 양곤을 떠나 오지인 이곳에 왔습니다. 두 여동생을 늘 보고 싶어 합니다. 한국의 여선생님도 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미얀마 오지로 왔습니다. 우린 깔레이의 간이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 마을, 어둠이 깔리는 거리에서 서울, 양곤에서 겪은 지난날들을 얘기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떠남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입니다. 낯선 관습과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일입니다.
아, 이제 저도 깔레이에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새벽이 밝아오면.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