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오후 늦게 소박한 옷차림으로 종이 쇼핑백에 필요한 자료를 넣고 혼자 올 수 있어요? 부하들이 옆에서 경호하면서 구십도 허리를 꺽는 인사장면을 보이지 말고 말이죠. 굳이 그렇게 해야 할까요?”
며칠 후 그가 낡은 티셔츠 차림에 평범한 바지를 입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소송관계 서류들이 들어있는 종이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왜 그렇게 움직일 때 위압적이고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나요?”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많이 배우고 속이 꽉 찬 사람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스로 빛이 나니까요. 그렇지만 나 같이 가방끈이 짧은 사람은 그렇게 해야 세상이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허영인지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장면을 연출하는 게 필요한 부류들이 있죠. 또 눈빛 하나만으로도 앞에서 얼어붙게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어요. 아무리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해도 내 앞에서 담배를 피려고 할 때 내가 눈빛만 한번 보내면 그 자리에서 움찔하게 동생들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잘 해 줄 때면 나를 비우고 모든 걸 주기도 하죠.”
건달세계에서 그의 리더쉽인 것 같았다.
“소년시절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건달세계의 최고가 되는 거였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가슴에 품어온 꿈이 있습니다. 그건 외교관이 되어 국제협상무대에서 상대방 나라의 대표와 당당하게 맞서 외교협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기본적으로 그런 기질을 타고 난 것 같았다. 분야가 다를 뿐이었다.
“지금까지 건달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정치건달이 되어 야당 당사를 공격할 때였습니다. 전국에서 동원된 건달들을 데리고 당사로 쳐들어갔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혼비백산해서 모두 도망쳐 들어갔어요. 마지막에 내가 도끼로 총재실 문을 찍어 넘어뜨리고 들어갔죠. 그랬더니 김영삼 총재가 그대로 앉아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의 앞에서 도끼를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보면서 ‘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암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순간 심복으로 알려진 한 의원이 달려와 김영삼총재의 허리를 잡고 창문 밖으로 떨어지더라구요. 그 아래 옆집 슬레이트 지붕이 있었습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도망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제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은 낮의 대통령이고 다른 사람은 밤의 대통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두 사람은 모두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 네모난 상자에 들어가 흙속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