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당사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측은 ‘현대그룹의 도움은 있었지만 뒷거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특검제를 놓고 양분된 가운데 국회 차원의 해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처럼 여야의 대립이 첨예한 가운데 <일요신문>은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출입국사실 자료를 입수했다.
박 전 실장의 출입국사실 자료는 1998년 3월31일부터 2001년 5월4일까지 해외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기록.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2000년 3월8일부터 같은 해 6월13일 정상회담 수행차 평양을 방문하기까지의 행보다.
▲ 지난 2000년 4월10일 박지원 당시 문광부 장관이 그해 3월8일 송 호경 부위원장과 만난 사진을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위는 <일요신문>이 단독입수한 박 전 실장의 출입국사실자료. 점선 안이 기사 관련 부분이다. | ||
[3월8일 싱가포르 출국]
박 전 실장의 3월8일 싱가포르행은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의혹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3월8일’은 사실상 남북정상회담이 본격 궤도에 오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날 유럽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이 있었고, 이날을 위해 남북한 간에는 무수한 밀사들의 접촉이 있었다.
현대그룹이 중심이 됐던 남북관계에서 처음으로 정부 차원의 물꼬가 트인 것은 98년 11월 북측의 전금철 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고문과 남측의 김보현 당시 국정원 대북담당 국장이 접촉하면서부터다.
99년 초 금창리 핵사태와 6월에 터진 서해교전으로 비틀거리던 남북관계는 10월에 이르러 해빙기로 접어들었다.
북한이 ‘전력과 도로 철도 등 SOC 건설을 한국정부가 지원한다면 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임동원 국정원장이 직접 아태위와 접촉에 나섰다.
북한은 물밑 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한국정부를 대표할 당사자로 국정원장이 아닌 김대중 대통령이 신뢰하는 인사를 특사로 지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임동원 국정원장을 대신해 3월8일 북측의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과 싱가포르에서 첫 대면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유럽을 순방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SOC 지원을 골자로 하는 ‘베를린선언’을 발표했다. 싱가포르 회동과 베를린선언 간의 연계성이 추정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짚어볼 대목은 정상회담 궤도진입의 시발점이 왜 ‘싱가포르’였는가 하는 점이다. 박 전 실장은 최근까지 싱가포르에서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과의 접촉사실을 숨겨오다 지난 2월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 때 그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정상회담의 대가나 뒷거래에 대해서는 한사코 부인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한반도문제 전문가 S씨 등 국내외 대북관계 전문가들은 “이면계약은 상식”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다시 말해 세계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거액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특히 박지원-송호경의 접촉 현장에 정몽헌 회장 등 현대그룹 고위관계자들이 있었고, 회동 장소가 싱가포르라는 점은 이면계약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일반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가는 해외자금 창구는 중국은행 마카오 지점의 아태위 계좌, 싱가포르 계좌, 최근 폐쇄 경고를 받은 오스트리아의 Golden Bank(북한명 금성은행) 등이다.
더욱이 평양에 싱가포르 은행 지점이 있다는 점은 싱가포르 회동에 ‘뒷돈’ 의혹을 제기할 만한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3월17·22일 중국행]
박지원 전 실장은 자료에 나타난 3월17일과 22일 중국행에 대해 일찍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2000년 4월10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통일부 회의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3월17일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이후 (3월22일) 베이징에서 비공개로 만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규모 경제협력 등 사전 조건은 없었다고 밝혔다.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는 지난 2월14일 기자회견에서 “현대의 대북사업이 결과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기여하기는 했으나 이는 전적으로 민간차원의 사업이었고 대북 송금도 정상회담 개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틀 뒤인 16일 정몽헌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북송금이 남북정상회담 성사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며 “2000년 3월8일 박지원 실장과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과의 첫 번째 만남을 주선했다”고 밝혀 정부와 사뭇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
실제로 박 전 실장이 3월17일 상하이로 가기에 앞서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은 16일 중국으로 날아가 미리 와있던 정몽헌 회장과 합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시간상으로 보자면 박 전 실장이 이들의 뒤를 좇아간 셈이다.
대북문제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남북 접촉은 정몽헌·이익치 두 사람이 송호경 부위원장과 만나 남북관계(정상회담, 송금문제 등)를 조율해 놓으면 박 전 실장이 와서 마무리를 하는 형태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박 전 실장은 3월17일 송호경 부위원장을 만난 지 5일 만인 22일 또다시 송 부위원장과 회동했다. 베이징에 머물던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도 19일의 귀국일정을 24일로 연기했다. 당시 현대그룹 ‘왕자의 난’으로 급박한 상황에서 두 핵심 당사자가 외국에서, 그것도 남북 실무자들이 회동하는 현장에 등장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장면’이다.
[4월8일 다시 중국행]
자료에 따르면 박지원 전 실장은 2000년 4월8일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돼있다. 이날 그는 베이징 차이나월드호텔에서 송호경 부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합의문에 최종 서명을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이 베이징에 등장해 현대가 남북정상회담에 깊숙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가중시켰다.
정 회장은 4월5일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이익치 회장, 김윤규 당시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가 귀국하지 않고 7일 돌연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익치 회장도 같은 날 정 명예회장과 함께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베이징으로 가서 정 회장과 합류했다.
당시에도 이들은 박지원-송호경 회동에 앞서 송 부위원장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앞서 언급한 3월17일과 22일 현대-송호경 접촉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현대와 정상회담 간에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케 한다.
박 전 실장의 3월25일 일본행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출입국 자료에 따르면 ‘공무수행’으로 기록돼있지만 일각에는 제3국 은행을 통한 대북송금과 관련됐다는 소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