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양산하는 ‘여혐 콘텐츠’, 생산자도 소비자도 가해자” 한 목소리 외쳐
6일 정오부터 오후 9시까지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120여 명의 여성들이 3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저마다 쉴 새 없이 노래와 구호를 외쳤다. 이날 여성들은 검은 가면이나 선글라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다음 카페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회원들과 이날 즉흥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일반인 여성들이었다.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주최 측에서 제작한 시위용 팜플렛 가운데 하나. 사진=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SNS 캡처
이날 이들은 여성 혐오 범죄와 이를 불러일으키는 여성 혐오 콘텐츠의 생산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이 같은 콘텐츠 생산을 묵인‧방관하는 남성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강남역 인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앓고 있던 30대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뒤 ‘여혐 범죄’에 대한 성찰과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년 여 만에 여성들이 다시 이 자리에 뭉치게 된 것 역시 “여혐 범죄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당초 ‘여성 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는 지난달 5일 한 30대 남성이 강남의 1인 왁싱업소를 찾아가 여주인을 살인한 ‘왁싱샵 여주인 살인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이 모여 진행돼 왔다. 이 가해 남성은 지난 4~5월 사이 ‘아프리카 TV’의 모 유명 BJ가 촬영한 왁싱업소 소개 영상을 보고 범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여성 1인이 운영하고 있다는 점,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업소여서 범행이 용이하다는 점 모두 영상을 통해서 확인된다. 더욱이 당시 BJ가 다소 성적인 방향으로 콘텐츠를 편집했고, 방송을 통해 피해 업소와 주인의 정보가 공개돼 범행으로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이번 시위에 앞서 지적돼 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무분별한 여성혐오성 콘텐츠가 결국 살인 범죄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라는 주장에 힘이 모아졌다.
시위 주최 측은 지난 1일부터 시위 기획에 착수하면서 “반드시 사전 확인된 여성들만 참여할 것”과 “운동권 등 타 단체의 참여를 배제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항거하는 시위이므로 반드시 여성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주최 측의 입장이었다. 이에 더해 사진과 영상 촬영에서 매우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기자들도 미리 주최 측에게 취재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경우 사진 촬영이나 취재가 제한되기도 했다.
6일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현장에 붙여진 시위 문구
실제로 이날 유투브 남성 BJ가 영상을 찍으려다가 주최 측에 제지를 당하는가 하면, 지나가던 남성들이 사진을 찍고 달아나다가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의 추격 끝에 붙잡혀 찍은 사진을 지우는 일도 발생했다. 그 외에는 약 9시간 동안 진행된 시위에서 별 다른 충돌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시위는 전날인 5일까지 피해 왁싱업소 여주인의 지인과 유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치기도 했다. 이들은 “유족들은 왁싱샵이니 미용업소니 이런 단어조차도 (보면) 순간 움츠러든다.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저희에게 이런 큰 관심과 공론화는 정말 더는 버틸 힘조차 없이 무너지게 한다”라며 시위를 중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이미 이 사건은 피해자 한 명의 문제 뿐 아니라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 사건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확인되지 않은 유족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다만 주최 측은 유족들의 호소를 감안, ‘왁싱샵 여혐 살인사건’이라는 용어를 제외하고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로 확정해 시위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