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막는 ‘바리케이드’로 전락
▲ 2004년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는 모습. | ||
김 의장이 발동한 ‘질서유지권’은 국회법 145조에 규정된 것으로 ‘의원이 본회의 또는 위원회 회의장에서 회의장의 질서를 문란하게 할 경우 의장 또는 위원장이 이를 경호 또는 제지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퇴장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국회의장 또는 상임위 위원장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으로 ‘경호권’보다 약한 수준의 권한이다.
‘의장은 국회 경호를 위해 국회운영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일정한 기간 국가경찰공무원의 파견을 요청할 수 있으며 국회 경위는 회의장 건물 안에서 경찰은 회의장 밖에서 경호한다’는 게 경호권의 내용. 국회법 144조에 규정돼 있으며 국회의장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김 의장의 결정에 따라 본회의장에서 점거 농성 중인 야당 의원들이 강제로 실려 나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나라 국회에서 경호권까지 행사될 정도의 파행을 겪은 적은 몇 차례나 될까.
그동안 국회에선 총 다섯 차례의 경호권 발동과 이번을 포함해 두 차례의 질서유지권 발동이 있었다. 경호권 발동은 4대 국회였던 1958년 8월 20일과 12월 24일, 5대 국회인 1960년 11월 23일, 10대 국회 1979년 10월 4일, 그리고 12대 국회인 1986년 10월 16일 이뤄졌다. 첫 번째로 경호권이 발동되었던 때는 4대 국회였던 1958년. 이 해 8월 20일과 12월 24일 두 차례 경호권이 행사됐다. 이중 잘 알려진 12월 24일의 경호권 발동은 당시 한희석 의장이 국가보안법 강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무술경관 300여 명을 국회 본회의장에 투입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개정안 가결을 막기 위해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퇴장·감금시키고 결국 자유당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었다.
1979년 10월 4일의 경호권 발동은 당시 백두진 국회의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당시 백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한 뒤 여당인 공화당은 회의장을 옮겨 단독으로 제명안을 처리했다. 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사퇴 결의는 헌정 사상 처음 있던 일이었다.
5공 시절인 1986년 10월 16일엔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신민당 유성환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최영철 부의장이 헌정사상 다섯 번째로 경호권을 발동했다. 당시 경찰 400여 명이 동원돼 국회 본관을 지켜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차단한 뒤 민정당 의원들끼리 날치기로 체포동의안을 처리한 바 있다.
지난 2004년 3월 12일 16대 국회에서는 박관용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적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당시 박관용 의장은 국회 경위 등을 동원해 의장석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탄핵소추안을 상정했다. 이날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불과 34분에 가결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는 모습만으로도 국회의 경호권 및 질서유지권 발동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과거 독재정권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경호권이 발동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국회의장으로서는 경호권 발동에 대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역대 국회의장들은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인이 된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85년 12대 국회 때 의장직을 맡은 뒤 끊임없는 날치기 파동 속에서 경호권 발동을 하지 않기 위해 서명을 거부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의 주역이 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 당시 청와대 측에 4당 대표회담을 제안하며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청와대의 거부로 결국 강공 모드로 돌아서고 말았었다. “명예로운 국회의장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공언해왔던 박 전 의장은 당시 의장은 투표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대리투표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