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중심 집단경영 주목받지만 M&A 등 중요 결정 과정 ‘총수 부재’ 드러날 듯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공여 등의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삼성은 지난 2월 28일 미전실을 해체하고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의 자율경영체제 전환을 핵심내용으로 한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지난 6개월간 사실상 삼성전자가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대외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것이 재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한 대기업 고위 인사는 “재계 1위 삼성이 총수가 없다고 해서 쉬이 흔들리거나 무너질 리 없다”며 “주요 경영사항은 면회를 통해 얼마든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 6개월간 이재용 부회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오히려 실적이 늘고 주가가 치솟았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매출액 61조 원, 영업이익 14조 700억 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9.76%, 72.7% 늘어난 데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23.1%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이사회를 중심으로 ‘집단경영체제’로 운영된다. 권오현 부회장과 윤부근 CE부문 사장, 신종균 IM부문 사장, 이 3명의 대표이사로 구성된 경영위원회에서 경영상 주요 사항들을 결정하고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이 3명의 대표이사와 5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집단경영체제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권오현 부회장이다. 권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을 총괄하고 있으며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또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과 구속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삼성의 대표격으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권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삼성을 대표해 동행한 데다 지난 7월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초청 기업인 간담회에도 삼성을 대표해 참석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과거 손길승 회장이 SK그룹을 대표했듯 권오현 부회장이 지금의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용 부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총수 부재의 시간이 길어지자 집단경영체제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앞으로 신사업 추진과 경영상 주요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느냐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오너가 있고 없고 차이는 실제로 어마어마하다”며 “인수합병(M&A) 시기를 놓치는 것은 물론 대외신인도에서도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해외사업 부문과 해외 기업 M&A에서 총수 부재는 ‘결정적 결함’이라는 지적도 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임기가 정해져 있는 CEO(최고경영자)들은 해외사업 부문에서 결정과 약속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만약 삼성이 하만 인수를 최종 완료하지 못했다면 이 부회장 실형으로 인수 자체가 잘못됐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하만과 인수 계약 후 지난 3월 최종 인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 해외 평가와 대외신인도 하락 불가피
이재용 부회장의 1심 판결이 나오자마자 외신들은 일제히 삼성그룹의 앞날을 어둡게 전망했다. 1심 판결이 있기 전부터 “이 부회장이 유죄를 받을 경우 삼성전자의 ‘리더십 부재’가 장기화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심 선고 직후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있는 가운데 이 부회장이 이 같은 선고를 받으면서 삼성의 혼란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삼성의 세계적 명성과 장기 전략에 큰 타격”이라며 “이번 유죄 판결로 삼성의 장기적인 방향은 물론 가족 승계가 타당한 것인지 의구심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밖에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BBC>, 일본 <NHK>, 중국 <CCTV> 등 세계 유력 매체들이 이재용 부회장의 1심 판결과 함께 삼성의 미래를 걱정했다.
외신들의 평가를 종합해볼 때 삼성그룹과 이 부회장의 대외신인도 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사업과 해외 M&A에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실제 삼성은 이 부회장이 구속 수감되면서 해외 M&A를 전혀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는 신사업 추진에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판결이 내려진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고성준 기자
# 이부진 사장 구원등판, 형제간 계열분리
최근 재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구원등판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의 위치와 인지도가 중요한 만큼 총수 부재 상황이 오래돼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부진 사장의 구원등판설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 2월,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구속된 이 부회장을 대신할 적임자로 이부진 사장을 언급했다고 알려지면서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으로 공백이 된 총수자리를 이부진 사장이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가능성 제로”라며 고개를 젓는다. 재계에서도 이부진 사장이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과 오빠인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몇 년 전에도 삼성그룹이 이재용의 전자와 금융, 이부진 호텔과 건설, 이서현 패션과 미디어로 계열분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나 전혀 맞지 않았다”며 “이부진 사장은 면세점 사업이 위태로운 호텔신라 경영에 신경 쓸 것으로 보인다”고 고개를 저었다.
삼성 측 송우철 변호사가 지난 25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1심 공판을 마치고 취재진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1심 재판이 열리기 전부터 재계에서는 ‘진짜 싸움은 항소심’이라는 말이 오갔다. 한 대기업 임원은 “국민정서상 1심에서 무죄나 집행유예가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됐다”며 “삼성 내에서도 1심보다 항소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말이 많았다”고 말했다.
1심 판결 직후 삼성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내부 분위기가 침통하고 걱정스럽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변호인단의 입장으로 대신해달라”고 언급을 피했다. 1심 판결 직후 삼성 측 변호인단은 “유죄가 선고된 부분을 전부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의지를 밝혔다. 송우철 변호사는 “1심 판결은 법리 판단과 사실 인정 모두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며 “즉각 항소할 계획으로 공소 사실 전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될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유죄가 인정된 ‘횡령’과 ‘재산국외도피’의 최저 형량이 5년이라는 점을 들어 이재용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것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앞의 대기업 고위 인사는 “중요한 것은 형량이 아니라 유무죄 입증”이라며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려면 1심에서 유죄로 판결된 일부를 뒤집어야 하는데 2심 재판부가 과연 이를 뒤집는 선고를 내릴지 의문”이라고 예상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최지성 실장과 장충기 차장을 법정구속한 사실은 꽤 충격적인 일”이라며 “재판부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이 맡고 있는 삼성 측 변호인단이 항소심에서 교체될지도 관심거리다. 1심에서 기소된 혐의가 모두 유죄를 받은 탓이다. 재계 한 인사는 “판결 직후 변호인단이 형량을 낮추겠다거나 유감을 표명한 게 아니라 모든 부분을 무죄로 돌리겠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의지를 보였다”며 “변호인단을 추가 구성하는 것은 몰라도 지금까지 재판을 준비해온 변호인단을 새로이 교체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내다봤다.
1심 판결 직후 삼성은 곧바로 항소심 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변호인단 교체나 추가 문제를 포함해 항소심 전략을 짜느라 삼성 내부가 분주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