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3월27일 현대그룹 경영자협의회 회의 장면. 정주영 명 예회장(가운데)은 이 자리에서 정몽헌 회장(오른쪽)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 ||
그러나 같은 해 3월 중순, 정몽구 회장이 현대의 위기와 경영부실의 책임을 물어 MH의 한 측근을 쳐내고 그룹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MK-MH 형제의 이른바 ‘왕자의 난’이 촉발됐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왕자의 난은 3월27일 아침, 사장단 30여 명이 참석한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 명예회장이 MH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을 안은 MH의 ‘현대호’는 몇 차례 암초를 만난 뒤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당시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가 MH 승리의 배경에 대해 ‘북한 문제와 관련된 고위층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언을 해 파장이 예상된다.
정 명예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해온 이 관계자는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은 사실 정 명예회장의 뜻이 아니라 외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문제’ 전화의 주체가 정 명예회장도 어쩔 수 없는 정부 고위층임을 시사해 ‘정부-현대-북한’이 얽힌 새로운 3각 커넥션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과연 당시 현대가(家)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2000년 3월15일 정몽구 회장이 MH의 오른팔 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전보시키면서 비롯된 현대가 ‘왕자의 난’은 초기에 MK의 대세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베이징에 머물던 MH가 같은 달 24일 오후 3시께 급거 귀국, 정 명예회장과 20여 분의 짧은 면담을 한 뒤 상황은 급반전됐다. 이날 오후 5시10분 MH는 전격적인 인사를 단행, 이익치 회장을 복귀시키고 MK의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직을 박탈했다.
이튿날인 26일 MK측은 정 명예회장의 결재 사인까지 공개하며 공동회장 복직을 선언했지만 하루 만에 메아리 없는 저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3월27일 아침, 사장단 30여 명이 참석한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 명예회장이 “경영자협의회는 정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맡아야 한다”며 MH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 이로써 10여 일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왕자의 난은 MH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정 명예회장이 MH를 ‘대권’의 주인으로 낙점한 배경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MH가 정 명예회장에게 MK의 인사조치의 부당함을 설득력있게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지난 2000년 3월22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구 회장(오른쪽) 등의 부축을 받으며 이사를 위해 청운동 집을 나서고 있다. | ||
그에 따르면 2000년 3월24일 MH가 정 명예회장과 독대했을 때 정 명예회장은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고함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을 정도였다는 것.
그는 당시 정 명예회장이 화를 낸 것은 독대 전에 외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정 명예회장이 무시할 수 없는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으며 그 내용이 명예회장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과연 이 관계자의 증언대로 전화 한 통이 현대가의 후계구도를 뒤바꿔놓은 걸까.
‘왕자의 난’ 당시 현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몇몇 계열사 대표들은 정 명예회장이 MH에게 대권을 물려준 배경에 대해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한 계열사 대표에 따르면 당시 정 명예회장은 일정한 정보라인을 통해 그룹 사정을 정확히 보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현대가 대북사업 이후 재무상태가 상당히 악화됐고 특히 MH 계열사에 심각한 위기가 조성된 것을 알고 특단의 조치도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
2000년 3월14일 MK가 전날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제기된 현대주 하락에 대한 책임론에 근거, 부친에게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전보 인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을 때 정 명예회장이 서명을 한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정 명예회장은 현대의 대권을 MH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 분수령이 된 것은 MH와의 24일 독대였다. 정 명예회장이 이날 MH에게 화를 낸 것은 외부의 입김으로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 아닐까.
구조조정본부 관계자의 말처럼 현대 ‘왕자의 난’의 향배가 ‘한 통의 전화’로 인해 바뀌었다면 과연 그 전화의 실체는 무엇인가. 문제의 전화를 정주영 명예회장도 거부할 수 없었다면 고위 권력층이 관련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왕자의 난을 전후한 MH의 행보는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줄 만하다.
MH는 2000년 3월24일 급거 귀국하기까지 중국 베이징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3월16일 출국, 정 회장과 합류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박지원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출입국사실자료(지난호 참조)에 따르면 박 전 실장(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같은 해 3월17일 출국, 상하이에서 북한의 송호경 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부위원장과 만났다.
송 부위원장은 현대 대북사업의 북측 파트너로 MH와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다. MH와 이익치 회장은 2000년 3월8일 박지원-송호경의 싱가포르 첫 회동을 주선했고, 현장에도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일설에는 박지원-송호경 상하이 회동에 MH·이익치도 동석했다는 얘기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2000년 3월24일 귀국 직전의 MH와 이익치 회장의 행보다. 당시 현대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본래 3월19일 귀국하기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후계구도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5일간을 북경에 더 머물다 24일 귀국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상하이 회동에 이어 진행된 3월22일 박지원-송호경의 베이징 회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설명이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몇몇 정보관계자는 기자에게 “박지원 송호경 정몽헌 이익치 네 사람이 베이징의 K식당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현지 정보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MH와 이익치 회장은 박지원-송호경 회동이 있기 전에 송호경과 먼저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왕자의 난’과 관련해 자신들의 위기상황과 대북사업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지원사격’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조율하던 송 부위원장으로 하여금 카운터 파트인 박지원 전 실장에게 MH측의 사정을 전달,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런 관측은 전직 현대 구조조정본부 관계자의 증언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과연 MH와 독대하기 전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걸려온 전화는 베이징 회동에서 비롯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전화를 건 주체는 누구일까.
우선 의문의 선 위에 올려질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북 관계에 관여했던 DJ정권의 실세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라인을 타고 전화가 걸려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운명의 그날 전화 한 통화로 ‘왕회장’을 움직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