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컷. 사진=쇼박스 제공
왼쪽 눈을 씰룩이는 남자가 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읽어가고 있는 김병수(설경구 분). 그는 과거 연쇄살인범이었다. 하지만 17년 전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되고 현재는 하나뿐인 딸 김은희(김설현 분)과 살고 있다.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하루하루가 똑같은 시골에서의 일상이지만, 특이한 점이라면 병수가 사는 도시에 수십 년 만에 다시 연쇄살인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다.
그러던 안개가 짙게 낀 어느 날 병수는 우연한 접촉사고로 민태주(김남길 분)을 만나게 된다. 태주의 차 트렁크에서 흐르는 핏방울, 병주는 태주에게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발견하고는 그 역시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이에 병수는 경찰에 태주를 연쇄살인범으로 신고하지만, 경찰은 믿어주지 않는다. 태주 역시 경찰이었기 때문. 알츠하이머로 태주에 대한 기억마저 오락가락하던 와중 오히려 태주는 은희의 남자친구로 병주 앞에 나타나며 그들의 주변을 맴돈다.
하나뿐인 딸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된 병수는 홀로 태주를 잡기위해 필사적으로 추격에 나선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끊겨가고 오히려 살인 습관들은 되살아나면서 병수는 망상과 실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면서 병수는 충격적인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는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포스터. 사진=쇼박스 제공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다. 워낙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만큼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과의 비교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본 기자는 원작소설을 읽어보지도, 사전정보도 전혀 듣지 못하고 영화를 봤다.
이에 원작소설을 읽은 이들의 평가를 간단히 빌려야겠다. 원작을 읽은 어떤 이는 “원작은 기억에 대한 내적 혼란과 독백에 가깝다. 반면 이번 영화는 연쇄살인범 간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작과의 차이점과는 상관없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꽤나 잘 만든 범죄 스릴러 영화다. 연출을 맡은 원신연 감독은 전작 <구타유발자들> <세븐데이즈> 등으로 이미 스릴러 장르에 대한 빼어난 실력을 선보인 바 있다.
영화는 병수의 시점과 독백으로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스토리는 병수의 현재와 과거, 실제와 혼동 사이를 복잡하게 오간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다니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메멘토>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메멘토>만큼 구조가 정교하지 않다)
기억을 잃어가는 공포를 사운드, 촬영, 액션으로 극대화해 체험 강도를 높였고, 시골의 황량한 풍경도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한다.
또한 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설경구는 이번 영화를 통해 말이 필요 없는 단연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기억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찡그리는 얼굴 표정만으로도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또한 경찰로서의 천연덕스러움과,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잔인하고 교활한 양 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남길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컷. 사진=쇼박스 제공
다만 아쉬운 지점도 있다. 태주의 정체를 조금 더 불분명하게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것이다. 태주가 영화에 첫 등장하는 접촉사고 장면에서 관객들은 태주의 서늘한 대사와 표정만으로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확신할 수 있다. 최근 일어난 연쇄살인의 범인이 내가 아닐지 혼란에 빠져있는 것은 오직 병수뿐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복잡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내러티브가 지나치게 평범하다.
태주의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서늘한 모습을 처음부터 보이고 싶었다면 샷구도를 병수의 시점으로 설정했다면, 관객들은 그 모습이 병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더 혼란을 느낄 수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살인자의 기억법>은 스릴러 장르 영화로서 줄 수 있는 재미와 긴장감을 충실히 따라가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에 무리가 없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