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성향 따라 ‘맞춤복’ 입는다
▲ 박근혜 전한나라당 대표 | ||
과연 정치인들의 옷차림은 어떤 특색을 갖고 있으며 여기엔 어떤 전략이 숨겨져 있을까. ‘패션 정치’에 담긴 교묘한 커뮤니케이션 공략 방법을 살펴보았다.
한 이미지 메이킹 전문가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옷차림은 외국에 비해 보수적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근래 들어 패션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외국에서는 패션을 통한 전략적 이미지 메이킹으로 자신만의 정치적 성향을 만들어냈던 사례가 많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은 10㎝에 가까운 빨간 하이힐과 무테안경으로 독특한 ‘페일린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빨간색, 청색 등 강렬한 원색의 옷과 진주 목걸이, 도트 무늬 스카프 등으로 자신의 강한 추진력을 표현한 바 있다.
많은 정치인들이 이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는 ‘옷차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유권자들도 잠재의식 속에서는 옷차림을 보고 특정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 정치인들에게는 옷차림뿐 아니라 핸드백,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을 통해 보다 다양하게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기에 패션 전략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여성정치인 중 패션을 통한 정치에 능한 이는 누구일까. 이에 관한 연구를 한 전문가들 대다수가 박근혜 전 대표를 손에 꼽는다. 박 전 대표만큼 패션을 정치적인 메시지로 이용하는 이도 없다는 것이다.
우선 패션을 통해 화려하지 않고 소탈하지만 기품 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연출한다는 것이 박 전 대표에 대한 평가다. 이를 ‘공주 패션’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상당수 패션전문가들은 박 전 대표가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스타일을 이어가면서도 자신만의 ‘박근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스커트와 재킷을 주로 입으며 베이지, 회색과 같은 중간톤의 색을 선호하는데 이와 같은 스타일에 대해 패션전문가들은 ‘클래식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패션평론가인 권태순 씨의 연구 논문(<여성 정치인의 외모 이미지와 유권자 수용태도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이러한 박 전 대표의 패션 스타일은 젊은 층보다 40대~50대 이상의 연령대에서 선호도가 높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당의 주요 지지층인 보수층과도 교집합이 크다. 즉 박 전 대표의 패션 스타일이 한나라당의 지지층에게도 어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 추미애 의원 | ||
박 전 대표의 패션 중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칼라’(옷깃)다. 박 전 대표의 의상 수백 건을 분석했던 한 의상전문가에 따르면 그가 공식석상에서 입었던 옷 중 약 70%가 ‘테일러드 칼라’(남성 양복 형식의 칼라)의 재킷이었으며, 약 24%는 테일러드 칼라 재킷에 와이셔츠 칼라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칼라 형태는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으로 박 전 대표의 ‘올곧은 당당함’을 드러내기에 알맞다는 평이다. 박 전 대표는 평소 브로치나 화려한 액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지만, 여기에 심플한 목걸이를 활용해 우아함을 곁들이곤 한다.
박 전 대표가 ‘클래식한 이미지’를 가진 반면 ‘내추럴한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으로는 추미애 의원이 있다. ‘추다르크’라는 별명처럼 강인하고 남성적인 성향을 가진 추 의원의 패션은 그의 성격대로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이 강점이다.
한때 화려한 패션으로 화제를 모았던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라이벌로 비교되었을 당시 추 의원은 다음과 같은 일성으로 패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식시킨 바 있다. 강 전 법무장관이 보라색 스타킹을 신고 국회에 등장한 뒤 기자들이 “보라색 스타킹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나보고 여성성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내가 여성성을 남편에게만 확인시키면 되는 것이지 전 국민에게 확인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답한 것. 당시의 이 발언은 오히려 자신의 투박한 패션을 통해 소신을 드러내는 ‘패션정치’로 평가될 수 있었다. 단지 옷을 ‘예쁘게’ 잘 입는 것이 전부는 아님을 보여주는 예였다. 상대적으로 ‘보라색’ 패션으로 화제를 모았던 강 전 장관에 대해서는 ‘여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지적이 따라붙었다.
추 의원은 옷을 살 때도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지역구(서울 광진구)에 있는 평범한 가게에서 주로 구입한다고 한다. 이처럼 추 의원은 ‘패션 전략’이라고 따로 거론하기 힘들 만큼 소탈한 의상을 고수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 이들 중에는 외모 면에서 추 의원이 상당히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패션전문가들은 “지금보다 좀 더 부드러운 스타일의 의상으로 남성적인 이미지를 완화해갈 필요도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낸 나경원 의원은 ‘떠오르는’ 패션 리더다. 지난해 12월 ‘제25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어워즈’에서 정치인 부문 베스트드레서상을 받기도 했던 나 의원의 패션 감각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을 정도.
대변인을 했던 경력 때문인지 나경원 의원은 패션 감각에서도 ‘아나운서’ 이미지가 엿보인다. 굵은 웨이브를 준 짧은 단발의 머리 모양과 튀지 않는 액세서리 역시 전형적인 아나운서 스타일.
나 의원은 주로 무채색이나 진한 톤의 치마 정장을 즐겨 입으며 치마 길이도 무릎선 바로 아래에 오는 기본형이 많다. 단조로울 수 있는 디자인이지만 여기에 밝은 색 스카프나 브로치로 포인트를 주는 센스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옷 잘 입는’ 나 의원이지만 평소 쇼핑을 즐길 만큼의 여유는 없다고 한다. 평소 자주 입는 스타일의 옷만을 고집하는 것도 패션에 변화를 줄 만큼의 짬이 없기 때문. 대신 친분이 두터운 디자이너 지춘희 씨로부터 가끔 ‘조언’을 얻는다는 후문이다. 지 씨는 지난해 나 의원에게 후원금을 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 나경원 의원 | ||
패션의 정치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색 중 하나는 바로 ‘빨간색’이다. 색채학에서 빨간색은 감각과 열정을 자극하는 색으로 강렬한 감정을 연상시킨다. 또 지속성, 육체노동, 힘, 긍지를 표현한다고 한다. 이 레드 컬러를 이용한 ‘파워 스타일링’은 워싱턴 정가에서도 애용되는 패션 전략으로 빨간색 넥타이를 맨 사람은 모두 정치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힐러리 미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세계적인 여성지도자들도 레드를 이용한 패션을 종종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별난 ‘빨간색 마니아’는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다. 홍 대표의 넥타이는 대부분 빨간색이다. 홍 대표가 빨간색을 선호하는 배경도 바로 ‘정치적’ 이유 때문. 홍 대표는 “러시아에서는 붉은색이 정의와 순수를 상징하며 정의(Justice)와 순수(Purity)의 첫 글자가 ‘준표’의 이니셜(JP)이기도 하다. 정의롭고 맑은 정치를 해보자는 뜻에서 빨간색 넥타이를 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홍 대표의 붉은 넥타이에 대해 패션전문가들은 그다지 높은 점수를 매기진 않는다. 너무 밝은 톤의 빨간색을 선택하는 탓에 유독 넥타이만 튀어 보이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
요즘 청와대와 한나라당에서 ‘밀고’ 있는 색은 다름 아닌 녹색이다. ‘녹색성장시대’를 만들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 때문.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제10차 람사르 협약 총회에 참석했을 때 녹색 넥타이를 매고 나와 “녹색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그린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녹색성장론에 발맞춘 ‘녹색 넥타이’는 이 대통령의 패션 정치학이 담긴 아이템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녹색성장위원회 회의에서도, 같은 달 26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제1기 생활공감정책 주부 모니터단 출범식’에서도 어김없이 녹색 넥타이를 매고 나와 ‘녹색성장’을 강조했다. 과연 ‘녹색 넥타이’로 패션정치학을 시도 중인 이명박 대통령의 전략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