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나쁜 놈으로 보일까 연구 또 연구”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더 이상 악역은 조연이 아니다. 평면적인 선역보다는 입체적인 악역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악역을 맡은 배우들의 위상도 달라졌다. 악역을 맡는 배우들의 외모와 위상 또한 크게 달라졌다. 최근에는 배우 송승헌, 윤계상, 이종석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잇따라 악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이종석. 영화 ‘브이아이피’ 홍보스틸컷
# 왜 그들은 악역을 맡았나?
차세대 한류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이종석은 얼마 전 개봉된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탈북한 사이코패스 김광일로 분했다. 북한 고위급 간부의 아들로 아버지의 권세 뒤에 숨어 살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탈북한 후에도 자금을 관리하던 아버지만 알고 있는 비밀열쇠를 쥐고 있다는 이유로 살인행각을 이어가면서도 제대로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이종석이 연기한 악역의 특징은 도무지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대담한 범행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기존 출연작에서 밝고 의로운 기운을 뿜어내던 그는 특유의 하얀 피부와 해사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어린 여성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목숨을 끊어놓는다.
그는 “완전 새로운 시도라서 겁이 났다. 사실 다 촬영해놓고 두렵기도 했다”며 “어떻게 차별화를 둘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감독님 덕분에 잘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시원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아 윤계상은 영화 <범죄도시>에서 하얼빈에서 넘어와 기존 세력을 진압하고 도시를 점령한 범죄조직의 보스 장첸을 연기했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장발로 외모에 변화를 준 그는 다양한 연장(?)을 휘두르며 상대를 제압하는 살육 연기를 직접 소화했다. 이미 영화 <풍산개>에서 고난도 액션 연기를 대역 없이 마쳤던 그는 <범죄도시>에서는 악인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눈빛 연기로 관객을 압도한다.
윤계상은 “어떻게 하면 나쁜 놈으로 보일지 굉장히 노력했다. 그런 영화들은 다 본 것 같다”며 “긴 머리가 (얼굴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어서 화가 나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좋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윤계상. 영화 ‘범죄도시’ 홍보스틸컷
# 생애 첫 악역을 택한 그들의 속내
이종석, 윤계상의 공통점은 데뷔 후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명이 추가된다. 10월 중순 개봉되는 영화 <대장 김창수>에 출연하는 배우 송승헌 역시 마수걸이 악역을 맡았다. 1995년 모델로 데뷔 후 무려 22년 만에 선한 캐릭터를 벗어던진 셈이다.
<대장 김창수>는 189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은 청년 김창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송승헌은 김창수가 갇혔던 인천 감옥소의 소장 강형식을 연기한다. 이 작품의 타이틀롤인 김창수 역은 배우 조진웅이 맡았다. 결국 송승헌은 이 작품을 위해 타이틀 롤과 선한 역 두 가지를 모두 내려놓은 것이다.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라 사실상 주인공 역할만 했던 그에게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송승헌은 “배우로서 안 해봤던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런 시기에 <대장 김창수> 시나리오를 만나게 됐다”며 “그래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도전해 볼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고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세 배우 이전에도 적잖은 배우들이 악역을 통해 이미지 쇄신을 꾀했다. 특히 깎아놓은 듯한 외모 때문에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한정적이라 평가받던 배우들이 악역으로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려 노력해왔다. 장동건은 영화 <친구>를 통해, 조인성은 영화 <비열한 거리>를 통해 각각 재평가받았다. 현빈 역시 개봉을 앞둔 영화 <협상>에서 인질범 역으로 이미지 쇄신을 시도한다.
송승헌. 영화 ‘대장 김창수’ 홍보스틸컷
# ‘악역은 CF를 못한다’는 옛말
악역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많은 배우들이 알고 있다. 밋밋하고 진부한 착한 역보다는 강렬한 악한 역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감정을 마구 분출할 수 있어서 연기적으로도 더 좋은 평가를 받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배우들이 악역을 꺼린 배경에는 상업적 이유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배우의 이미지가 제품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CF의 특성 상 악역으로 각인된 배우들에게는 CF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대장 김창수>에서 송승헌과 호흡을 맞춘 조진웅이 “이 잘생긴 외모로 눈빛이 변할 때는 정말 무서웠다. 너도 이제 광고는 다 했구나 싶었다”고 너스레를 떤 이유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악역을 맡아도 매력이 있다면 CF시장에서도 러브콜을 보내곤 한다. <베테랑>에서 안하무인 재벌을 연기한 유아인은 오히려 이 영화를 통해 더 각광받았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특정 이미지에 갇히면 배우로서 생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꽃미남 배우들이 악역 도전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방편”이라며 “이 틀을 깨면 오히려 대중은 더 열광하며 배우로서 재평가받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