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거쳐 종착역에 줄댔나…
▲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 ‘추 전 비서관은 장식용일 뿐 몸통은 따로 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
특히 민주당은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추부길 전 비서관은 장식물이다. 문제는 몸통이다”라며 수사의 형평성 문제를 집중 제기하며 확전을 도모하고 있다. 사실 여의도 정치권에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지난해 7월부터 세무조사 무마를 위해 여권 핵심 실세에게 로비를 시도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추 전 비서관은 말 그대로 ‘다리’였을 뿐, 박 회장이 기대했던 ‘언덕’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박 회장이 최근 몇 년간 뿌린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는 여권 핵심부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도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의 몸통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선까지 닿아 있는지 추적해봤다.
연차 게이트’의 몸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초토화’됐다는 점에서 ‘박연차 게이트’ 몸통의 한 축은 노무현 전 대통령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정치권에선 어떤 식으로든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조사’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불미스런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정치적 사망 선고’라는 점에서 현 정권의 ‘노무현 죽이기’는 그 목적달성을 향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정치권에 들어와 보니 ‘보스’와 ‘부하’의 관계를 알 것도 같다.
이광재 의원이 ‘정계은퇴’를 미리 밝히며 배수진을 친 것도 ‘주군’으로 향하는 칼끝을 ‘내 선에서 끝내라’는 이 의원의 마지막 저항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박 회장의 로비 자금이 140억 원이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이 이 의원의 구속 정도에서 마무리될 리는 없다.
정치권에선 “검찰이 일찍부터 ‘박연차 리스트’의 몸통을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단정 짓고 그 타깃의 타격을 위해 장애물(노 전 대통령 측근)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 같다”라는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박연차 게이트’에는 노 전 대통령 외에 또 다른 몸통은 없을까. 자연히 눈길은 여권으로 쏠린다.
일단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한 여권의 몸통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지난해 4월경부터 은밀하게 국세청의 태광실업 내사가 시작된 뒤 박 회장이 그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이명박 정권 ‘핵심 실세’에 줄을 대려고 했던 것과 관련한 몸통이 하나 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박 회장이 지난 2004년 무렵부터 각종 선거와 관련해 현재의 여권 인사에 뿌린 정치자금과 관련한 ‘몸통’이다. 먼저 국세청 세무조사 무마와 관련, 추 전 비서관이 ‘몸통’이라고 보는 견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박 회장이 추 전 비서관에 돈을 건넨 시점은 그가 청와대에서 물러난 9월이었고,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냈던 그에게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했다는 점도 ‘몸통설’에 의구심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몸통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추 전 비서관은 말 그대로 ‘다리’일 뿐 아니겠는가. 정작 박 회장이 추 전 비서관 같은 인사들을 앞세워 로비를 했던 사람은 따로 있다고 본다. 현 정권의 핵심 A 씨에게 로비를 하기 위해 그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A 씨가 이런 저런 이유로 추 전 비서관과의 ‘일’에 대해 발을 빼버렸고, 결국 추 전 비서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세무조사 무마 로비는 실패로 끝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추 전 비서관은 여권 핵심 A 씨가 박 회장의 일을 도와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또 다른 한나라당 관계자는 “추 전 비서관이 여권 핵심 실세에게 부탁해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박 회장의 부탁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돈을 받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박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된 수사 결과는 추 전 비서관의 구속이 전부다.
추 전 비서관은 “돈을 받긴 했지만 생활비로 썼고 청탁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치권에선 “검찰이 현직 여권 고위직이란 ‘살아 있는 권력’을 보호하면서도 여권 인물을 수사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실직했던 비서관을 끼워 넣기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벗기 위해서라도 로비의 최종 대상인물을 명확히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대통령의 측근 C 씨가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 ‘몸통’이라는 견해도 있다. C 씨는 지난해 박 회장의 세무조사 로비 과정에서 거액을 받은 정황이 포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한 언론은 “박연차 회장이 추부길 전 비서관에게 거액을 건넨 직후인 지난해 9월 말, 박연차 회장의 계좌에서 10억 원의 뭉칫돈이 빠져나갔다.
검찰이 이 돈을 추적한 결과,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막후 실세로 알려진 기업인 C 씨에게 전달된 단서가 포착됐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 회장은 “경제 위기로 많은 기업들이 어려웠던 때라 순수하게 자금을 지원했을 뿐”이라고 검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 ||
이 대통령 측근 C 씨와 함께 전 청와대 수석 L 씨가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 ‘몸통’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C 씨와 L 씨는 지난해 7월경 박 회장의 ‘로비’를 받고 그의 구명과 관련한 대책회의를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L 씨의 동생이 박 회장과 돈 거래를 한 사실도 밝혀지면서 더욱 L 씨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의 경우 ‘돈 거래’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대책회의’ 수준의 혐의로는 사법처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박연차 게이트’의 또 다른 몸통은 여권의 각종 선거자금 또는 일반 정치자금과 관련한 것이다. 이는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 몸통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대가성이 분명했던 세무조사 로비와 달리 선거자금이나 정치자금의 경우 그 경계가 모호해 검찰의 수사 의지에 따라 여권 핵심부에 타격을 줄지, 아니면 일부 여당 의원의 구속에서 그칠지 판가름이 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뿌린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간 ‘종착역’으로 언급되는 인사들 중에는 현 정권의 ‘핵심’도 들어있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서도 언급된 이명박 대통령 측근 C 씨는 이 부분에서 ‘환승역’으로 통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박 회장과 두 살 터울에 동향(경남 밀양)인 C 씨는 여권 핵심과 박 회장을 잇는 파이프라인이었다’라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래서 C 씨의 ‘처리’ 여부는 ‘박연차 게이트’와 여권 커넥션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C 씨는 이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다. 고려대 61학번 동기에다 ‘6·3 동지회’ 멤버로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지난 대선 직전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낸 특별당비 30억 원도 C 씨가 빌려줬다.
이런 C 씨는 박연차 회장이 현 여권에 줄을 대려고 했을 때 그 시발점을 마련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C 씨가 노무현 정권 실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 회장이 지난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이명박 정권 핵심과 줄을 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 주변을 잘 아는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은 정권 교체 가능성이 커지자 노무현 정권 실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친교 관계가 없었던 이명박 정권 인사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라고 말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박 회장은 대선 직전 사실상 저쪽(이명박 후보)으로 넘어갔다.
우리 쪽에서 배신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라는 서운한 반응도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박 회장처럼 권력의 풍향에 민감한 사람이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이 등장한 2006년 중반부터 정권교체가 기정사실처럼 돼 있는데도 ‘다가올 정권’ 사람들을 모른 체하며 무방비 상태로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현 여권 실세들에 대한 로비는 ‘상식적인 이야기’로 통한다.
더욱이 박 회장이 지난 2007년 대선 과정에서 가만히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향후 박연차 게이트는 대선자금 정국으로 유탄이 튈 수도 있다. 박 회장은 지난 2004년 6월 경남도지사 재·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던 장인태 전 행정안전부 차관에게 8억 원을 선뜻 내준 적이 있다.
정치권에선 박 회장이 친분이 깊지도 않던 장 전 차관에게 8억 원이라는 거액을 지원한 것을 두고 그 액수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8억 원이라는 거액을 썼다면 국가의 권력을 결정짓는 대선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게 한나라당 주변의 시각이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자금과 관련해 C 씨의 ‘역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한 언론에서는 “검찰과 정치권 안팎에서는 박 회장이 지난 대선을 앞두고 C 씨 측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네 이 대통령에게 줄을 댔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라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특히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박 회장이 대선 과정에서 C 씨를 통해 거액을 베팅했고, 그 자금이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쓰여졌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도 오고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권의 또 다른 핵심 실세인 B 씨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박연차 게이트’가 박 회장에 대한 구명로비 차원을 넘어 여야의 대선자금 수사로 이어질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폭발력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서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최근 “지난 대선 과정에서 어떤 기업으로부터도 도움 받은 일이 없고 출발점에서부터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도 없기 때문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끈다.
이는 ‘박연차 게이트’가 대선자금 수사로까지 비화되더라도 자신이 있다는 의지의 간접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청와대가 이번 사건의 결말을 대선자금 수사로까지 확대해서 예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연차 리스트의 정치자금 수사와 관련해 검찰은 2004년 6월(장인태 전 차관의 경남도지사 재·보궐 선거와 관련 구속된 사례)부터 현 시점까지 거슬러 오르면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가 5년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사건만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만간 정치자금법과 관련해 지난 2006년 지방자치단체 선거, 2007년 대통령 선거, 2008년 총선으로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이 1라운드 수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그 결과와 여론의 추이, 청와대의 분위기 등을 참고해서 대선자금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박연차 게이트’는 이명박 정권이 집권 2년차를 맞아 빼든 히든카드다. 아군의 피해를 예상하고 퍼붓는 집중포화의 성격이 짙다. 검찰도 서슬 퍼런 살아있는 권력의 ‘주문’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나온 또 다른 ‘히든카드’가 결국 정권 말 현 권력의 폐부를 깊숙이 찌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박연차 게이트’는 너무 위험한 카드놀이라는 게 여권 일각의 시각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