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감성의 영화 ‘행복’ 내년 크랭크인…고향집 근처 둘레길 만들어 행복한 쉼터 만들고파
신성일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한국영화회고전의 주인공이다. 12일 개막해 21일 막을 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맨발의 청춘> <길소뜸> 등 대표작 8편을 소개했다. 덕분에 영화제 내내 누구보다 분주한 일정을 소화한 그를 부산에서 만났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햇수로 57년째 배우로 살아왔지만 영화를 향한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뜨거워지는 듯했다. 인터뷰로 주어진 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명함을 건넸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듯 좀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일어선 채로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는 신성일.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 “요즘 한국 영화 너무 잔인…애정 넘치는 영화 만들겠다”
신성일은 “죽어서 어디에 묻힐지까지 정해 놨다”고 했다. 화려한 자신의 과거만큼 미래 설계에도 망설임이 없다. 동시에 그는 새로 기획한 두 편의 영화 구상에도 여념 없다.
“내년에 <행복>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시작한다. 원래 올해 제작할 생각이었지만 6월에 갑자기 폐암 선고를 받아서 조금 미뤘다. 요즘 한국 영화들 너무 잔인하지 않나. 사람 죽이고, 분노하고, 사회 비판하면서 복수만 하고 있다.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 그래서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어느 기사를 보니 여자들의 영화가 없다고 한다. 여배우가 없는 영화만 있다 보니 더 잔인한 영화가 나오는 거다.”
<행복>은 조부모와 손자까지 등장하는 3대의 이야기다. 현재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다. 신성일은 “나와 윤정희가 조부모를 맡고, 그 다음 세대로 안성기와 박중훈, 손자손녀로 팔팔하게 뛰는 젊은 연기자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시나리오가 수정되면 배우들과 구체적으로 대화할 계획이다.
동시에 그는 얼마 전 읽은 김홍신의 소설 <바람이 그린 그림>에 감명 받아 영화화 작업도 시작했다. 김홍신과는 비슷한 시기 국회의원을 하면서 ‘형님, 아우’ 하는 사이. 신성일은 “깨끗한 멜로인 데도 서스펜스가 있다”며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신성일은 1960년대 시작해 197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배우다. 그 활동은 2000년대 접어들어서도 계속됐다. 최근작은 2013년 주연한 <야관문:욕망의 꽃>. 노년의 욕망을 그려낸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지만 손해는 나지 않았다. “적은 예산으로 제작한 영화인 만큼 제작비를 회수했다”고 말하는 신성일에게서 꾸준한 영화 참여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사실 신성일은 ‘한국 영화의 역사’로 불러도 무방한 배우다. 1960년대 청춘스타의 상징이고, 미남배우의 대표다. 1967년 한 해에 주연한 영화가 무려 51편에 이를 정도.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1964년에 두 사람이 함께한 영화도 26편이나 된다.
출연한 영화가 500여 편에 이르다보면 과연 자신이 참여한 영화의 제목과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까. 주연 영화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고 싶은 영화는 있을까. 질문을 받은 신성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고부터 우리나라에 문화정치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사람들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 온통 TV에만 집중한 정책을 펴서 영화는 완전 말살되고 말았다.”
한국 영화 최고 스타로 통한 신성일도 일이 뚝 끊겼다. “전두환이 싫어서 상대 정당으로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는 그는 연기는 할 수 없어 당시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업 교재는 대부분 자신이 출연한 영화로 했다. 출연작을 소개할 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작품별 내용은 물론 제작연도까지 줄줄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한국영화회고전의 밤 행사에 참석한 신성일.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 영화 <만추> 다시 나오기 어려운 대표작
한 시대를 상징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신성일이지만 때때로 “딴따라”라고 불리며 무시당할 때도 있었다. 그는 “딴따라가 되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1965년의 일이다. 영화 촬영하러 부산 해운대에 왔다가 건달 후배가 자기가 운영하는 스탠드바에 초대했다. 맥주 한 잔 하려고 그곳에 들어섰더니, 구석 자리에 있던 누군가 ‘딴따라 들어온다’고 비아냥대더라. 그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다가가서 ‘젊은이! 나는 딴따라가 아니다. 영화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젊은이에게 사과를 받았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져서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마신 맥주 값을 전부 냈다. 하하!”
50년 전 일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신성일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영화 <만추>를 꼽았다. 이만희 감독이 연출해 1966년 제작한 영화다. “한국 영화 영상미를 완성한 작품이자 일본에서 처음으로 리메이크된 영화”라고 자부심을 드러낸 그는 “내가 출연했지만 영화 속 남자주인공은 지금 봐도, 내가 봐도, 정말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신성일은 <만추>를 찍고 바로 다음해 이만희 감독과 또 다른 영화 <휴일>을 함께했다. 이 작품을 제작한 연방영화사는 한국영화 첫 여성제작자로 기록된 고 전옥숙 여사가 운영하던 곳이다.
“전옥숙 여사는 이화여고 다닐 때부터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으뜸인 똑똑한 학생이었다. 투박한 경상도 말투를 쓰는 대단한 여성이다. 우리 어머니와 전 여사의 어머니가 친한 관계라 나도 잘 알고 있다. 전옥숙 여사는 한국전쟁 이후에 재판을 받았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때 교도소장으로 만난 홍의선 중령과 훗날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영화감독 홍상수다.”
영화와 함께 살아온 방대한 활동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신성일은 과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 앞날에 대한 설계와 구상에도 열의를 보이고 있다. 두 편의 영화 제작 외에도 고향인 대구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여든 살까지 살았다. 이 정도 살아보면 살아가는 일보다 이웃에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지금 고향인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짓고 살고 있다. 우리 집 주변 길이 정말 좋다. 주변 둘레 길을 만들어 행복한 쉼터로 만들고 싶다. 작은 음악회도 열면서 말이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