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슨 “모든 영화 비즈니스에 관행처럼”…위더스푼 “제작사·소속사 침묵 강요 한통속”
영화사 관계자들로부터 성추행 및 성접대를 강요당했다는 여배우들의 폭로가 줄을 이으면서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던 성추행 관행이 급기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시작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였다. 지난 10월 5일 <뉴욕타임스>는 일련의 제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65)의 만행을 낱낱이 폭로했다. 와인스타인이 자신의 지위와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지난 30여 년 동안 신인 여배우들을 비롯한 배우 지망생들을 겁탈하고 성희롱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귀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헤더 그레이엄, 애슐리 주드 등 유명 배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 충격은 더욱 큰 상태다.
<뉴욕타임스> 보도 이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비슷한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줄을 이으면서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추악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비단 와인스타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할리우드 곳곳에서는 배역을 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이른바 ‘캐스팅 카우치’가 관행처럼 이뤄져 왔으며, 이런 악습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쉬쉬한 까닭에 수면 아래 묻힌 채 용인돼 왔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및 성추행을 용기 있게 고발한 할리우드 여배우들. 윗줄 왼쪽부터 아시아 아르젠토, 로잔나 아퀘트, 제시카 바스, 카라 델레바인. 가운뎃줄 왼쪽부터 로몰라 가레이, 쥐디트 고드레슈, 헤더 그레이엄, 앤젤리나 졸리. 아랫줄 왼쪽부터 애슐리 주드, 로즈 맥고완, 레아 세이두, 미라 소르비노. AP/연합뉴스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기 위해 모두가 몸과 영혼을 파는 곳, 그리고 모두가(특히 여성들이) 상품처럼 간주되는 곳이 바로 할리우드다.’
1995년 <보스턴글로브>의 피터 쿠프가 이렇게 말했듯이 할리우드에서는 그동안 ‘캐스팅 카우치’가 비일비재하게 자행되어 왔었다.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용기 있게 고발한 여성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들의 목소리는 묻히거나 외면되어 왔었다. 이유인즉슨, 가해자는 할리우드의 영향력 있는 영화제작자 혹은 감독들인 반면, 피해자는 어린 신인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캐스팅 카우치’는 힘있는 영화계 거물들이 어리고 힘없는 배우 지망생들을 상대로 ‘배역을 주겠다’ ‘스타로 만들어주겠다’ ‘유명 제작자에게 소개시켜 주겠다’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성적인 요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행은 1920~30년대 영화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그 역사를 같이 하며, 처음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에서 시작됐다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레드랜즈 대학의 캐슬린 필리는 “할리우드의 성추행은 영화 산업의 역사만큼 오래됐다”고 말했으며, 1920년 <포토플레이> 잡지는 ‘영화 산업계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보도하면서 “젊은 여성들은 영화사 제작자, 감독, 영향력 있는 남자 배우들의 구애에 굴복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캐스팅 카우치’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제작된 무성영화 <캐스팅 카우치>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배역을 얻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감독으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는 여배우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번 와인스타인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캐스팅 카우치’ 관행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디 해럴슨은 1996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뉴욕에서 접한 모든 (영화) 비즈니스에서는 ‘캐스팅 카우치’가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달갑지 않은 상대와 잠자리를 갖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봤다”고 말했다. 또한 프랑스 배우인 레아 세이두 역시 “할리우드에서는 와인스타인 같은 남성들과 항상 마주쳤다.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 가운데에도 성희롱을 하거나 성관계를 요구하는 식의 불쾌감을 줬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리즈 위더스푼 역시 최근 고백을 통해 “16세 때 감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위더스푼은 “하지만 당시 제작자와 소속사는 나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캐스팅 조건으로 나에게 침묵하도록 한 그들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또한 “한 번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추행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처럼 ‘캐스팅 카우치’가 여전히 근절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하는 할리우드의 강압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의 경우 ‘다시는 할리우드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것’이라는 협박을 당하고 있으며, 이런 협박을 당한 경우에는 경력이 단절될까봐, 혹은 모욕을 당할까봐 두려워 입을 다물어야 했었다. 때문에 설령 성추행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의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알려진 할리우드 성폭행 사건의 충격적인 사례는 버지니아 레이프의 사망 사건이었다. 무성 영화배우였던 레이프는 지난 1921년,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서 복통을 호소하고 쓰러졌다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온갖 괴담이 오갔다.
목격자였던 동료 배우인 밤비나 델몬트가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당시 유명 코미디 배우였던 로스코 아버클이었다. ‘뚱뚱보 아버클’로 불렸던 아버클은 찰리 채플린의 스승으로도 유명했으며,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
델몬트는 당시 법정에서 “비명 소리를 듣고 호텔방으로 들어갔더니 레이프가 옷이 찢긴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으며, 온몸이 피투성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레이프가 아버클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 틀림 없다고도 주장했다. 부검 결과 레이프의 사인은 방광 파열 및 복막염이었으며, 사망 직전 레이프는 “아버클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죄를 주장했던 아버클은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결국 무죄로 방면됐지만, 배우로서의 인생은 거기까지였다. 그후 아버클은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대중들에게서 서서히 잊혀 갔다.
주디 갈렌드와 루이스 메이어. 갈렌드는 16세 때 처음 메이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요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4년 동안 반복된 성추행을 견디다 못한 갈렌드는 급기야 “메이어 씨, 다시는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항의했다.
미국인들의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아역 배우 출신인 셜리 템플 역시 할리우드의 음흉한 손길을 피해가진 못했었다. 12세 였던 지난 1941년, MGM 제작자였던 아서 프리드로부터 불쾌한 성추행을 당했던 것. 당시 프리드는 미팅 도중 템플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노출했으며, 한동안 템플은 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런가 하면 마릴린 먼로는 회고록 <마이 스토리>에서 할리우드의 이런 관행을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었다. 먼로는 “일부 제작자나 감독의 눈에는 할리우드는 북적이는 매춘굴이었다”라고 말하면서 “또한 그들은 할리우드를 침대 달린 회전목마처럼 여겼다”고 비난했다.
조앤 콜린스의 경우에는 성접대 요구를 거절했다가 배역을 놓친 뼈아픈 경험을 했다.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주연을 따내기 위해 두 차례 오디션을 봤던 콜린스는 당시만 해도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하지만 제작사 대표의 성관계 요구를 거부한 후 모든 것은 바뀌었다. 콜린스는 “그가 나를 사무실로 데려가더니 ‘정말 이 역할을 맡고 싶어?라고 물었다. 내가 ‘네. 정말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자 ‘그래, 그렇다면 얌전하게 굴기만 하면 돼’라고 말했다”라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콜린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은 배역을 놓치고 말았다. 그후 클레오파트라 역할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돌아갔다.
<더퀸>의 헬렌 미렌은 1964년 면접을 보던 중 마이클 위너 감독으로부터 부당한 성희롱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감독이 캐스팅 도중 뒤를 돌아보라고 말한 뒤 옷을 벗고 몸매를 뽐내보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미렌은 “그런 요구가 모욕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느꼈다. 할리우드의 어떤 배우들도 마치 고깃덩어리가 된 것 같은 취급을 당할 권리는 없다”며 불쾌한 심리를 드러냈다. 하지만 위너 감독은 “그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무명 시절 ‘캐스팅 카우치’를 경험했던 샤를리즈 테론은 지난 2009년 <OK!>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당시 18세였다고 말한 테론은 “오디션이 토요일 저녁에 감독 집에서 열린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찾아갔다”고 말하면서 “집에 갔더니 그 감독은 잠옷 가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음료 한 잔을 건네자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곧 알아챘다”고 말했다. 다만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고 말했다.
메건 폭스는 스타가 된 이후에도 부당한 성접대 요구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해진 섹시 스타 메건 폭스는 이미 스타가 된 후에도 부당한 성접대 요구를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영국판 <GQ>를 통해 이같이 밝힌 폭스는 “이런 일은 내가 배우로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늘 있어왔다”고 말하면서 “대개는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과 만날 약속이 잡히면 아마 ‘그런 분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면서 흥분할 것이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그런 일은 아직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캐스팅 카우치’의 불쾌한 경험을 했던 사실을 털어놓은 배우들로는 골디 혼, 제인 폰다, 수잔 서랜든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영화사 사장이나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당했으며, 거절할 경우 해고를 당하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이처럼 피해를 입고도 그동안 침묵했던 배우들은 그동안 용기가 없었던 자신들의 비겁함을 자책하면서 뒤늦게라도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한편, 부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앞으로 나서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알리사 밀라노가 시작한 ‘미투(#Metoo)’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밀라노는 트위터를 통해 “당신이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당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트위터에 ‘미투’라고 써달라”고 촉구했다. 이에 할리우드 배우를 비롯해 일반인, 학생, 스포츠 스타들까지 동참하면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미투 운동’이 과연 사회 전반에 걸친 성차별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