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수능, ‘쿠쿠다스’같던 너”...미리 사제품으로 연습까지...수능 샤프 콜렉터까지 등장
‘감’ 익히기 위해 전년도 수능 샤프 구매하기도
‘유미상사’냐 ‘바른손’이냐 엇갈리는 수험생 희비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매년 수능때 수험생들에게 지급되는 수능 샤프 펜슬은 항상 이슈가 되곤 하는데요. 올해는 과연 어떤 샤프가 수험생의 손에 쥐어질까요. / 사진= 인스타그램 namw****** 캡쳐.
[일요신문]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대한민국 전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위해 움직입니다. 직장인들은 출퇴근을 늦추고 항공기 이·착륙도 이 시간에는 일시 중단됩니다. 대망의 수능날, 수험생들은 입실 후 감독관으로부터 ‘연장’을 아니, 샤프(샤프펜슬)를 지급받습니다. 이름하야 ‘수능 샤프’.
이전에는 시험장에서 사용 가능하던 개인 샤프가 2005년에 치러진 2006학년도 수능부터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사용이 금지됐습니다. 그 대신 교육과정평가원(이하 ‘교과평’)이 수험생들에게 0.5㎜ HB 샤프심 4개가 들어 있는 ‘수능 샤프’를 지급했습니다. ‘고작 샤프가 뭐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시험지 넘어가는 소리에도 예민한 수험생들에게 샤프란 매우 민감한 것. 말 많고 탈 많은 역대 수능 샤프의 역사를 훑어보겠습니다.
수능이 만들어진 이래, 2005학년도 수능에 사상 초유의 부정행위가 적발됐습니다. 당시 초소형 카메라와 휴대폰, 그리고 샤프 등을 이용한 컨닝이 대규모로 적발되며 이후 2006학년도 수능부터 교과평은 수능 샤프를 지급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험생이 개인 샤프를 사용할 경우 부정행위로 간주돼 해당 수험생의 시험은 무효화 됐습니다. (‘개인 샤프 사용 가능 여부’에는 시험 감독관의 재량이 많이 반영된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 2006~2010학년도 수능 샤프
수험생들의 사랑을 받아온 샤프들입니다. 샤프의 색은 대부분 파란색·짙은 회색·검은색으로 제작돼 자연스레 수능의 상징이 돼버려 한동안 ‘파란색 샤프가 아니면 수능 재수가 없다’는 징크스도 돌았습니다.
교과평은 수능 샤프 선정을 위해 5~6개 문구 업체를 경쟁입찰하고, 여기에서 샤프의 품질과 공급 단가 등을 고려해 한 개의 업체만 최종 낙찰자로 선정하게 됩니다.
이 입찰에 따라 필기구 전문업체인 ‘유미상사’의 ‘미래샤프’가 낙찰됐습니다. 당시 수능 인원은 65만 명. 엄청난 규모의 대국민 시험에 제공되는 샤프를 제작하는 만큼 유미상사가 ‘떼돈’을 벌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입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샤프 1개당 공급 단가는 250원으로 마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진= 2006~2010학년도 수능에 제공된 미래샤프. / 출처= 유미상사 홈페이지
그러면 미래샤프는 왜 밑보는 장사를 했을까요? 바로 홍보효과 때문입니다. ‘수능 공식지정 샤프 펜’이라는 이름표 만으로도 수능 준비생 등을 타깃으로 한 매출 상승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샤프에 대한 사용자들의 평도 꽤 좋은 편입니다. 그립(고무 부분)을 세게 잡으면 금방 늘어난다거나 마개 쪽에 달린 지우개가 허접하긴 하지만, 한 번의 펌핑질로 장시간 사용할 수 있고 무난하다는 등 내구성에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시중에서 단돈 1000원이면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가성비가 훌륭하다는 평입니다.
그 당시, 미래샤프는 매년 수능 직전이면 품귀현상을 빚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수능에 앞서 수험생들이 미리 샤프의 감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삼아 ‘적응용’으로 먼저 구매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년 동안 미래샤프는 수능 샤프 납품은 물론, 덩달아 문구류 시장에서 반짝 인기를 누렸습니다.
# 2011학년도 수능 샤프
그렇게 5년 동안 수험생들로부터 관심을 받던 미래샤프는 입찰권을 ‘바른손’의 제품 ‘제니스’에게 뺏기며 잠깐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제니스는 아무래도 다른 제조사의 제품이다보니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동안의 수능 샤프들과 다르게 생소한 외관을 띄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도 수능이 끝나고 난 직후, 수험생들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수능 샤프심’이 올랐고 교과평 홈페이지에는 “수능 샤프때문에 내 수능 망쳤다”는 내용의 항의 글이 빗발쳤습니다. 몇글자 쓰다보면 ‘뚝’ 부러지고, 쓰다보면 또 ‘뚝’ 부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디시인사이드 캡쳐
당시 이를 두고 아고라에서는 평가원을 대상으로 ‘불량샤프 진상규명 청원운동’ 글도 올라왔습니다. 이는 하루 8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국민적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후 감사원의 감사를 통해 드러난 ‘수능 불량샤프’ 실체는 기가 막혔습니다. 당시 입찰 대상은 ‘국산품’으로 제한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정 업무에 참여한 교과평의 A 평가원은 앞서 규정과 달리 중국 생산업체에서 주문자 생산방식(OEM)으로 납품받은 중국산 샤프 2종을 제출한 바른손을 입찰 대상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제시 가격이 가장 낮았던 바른손이 낙찰됐는데, 이마저도 2010학년도에 제공된 수능 샤프보다 고작 17원 저렴했다는 점에서 더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수능 응시료 4만7000원을 낸 수험생들에게 17원 아끼려다가 이런 사단이 난 것입니다. 불량 샤프 지급으로 교과부가 절감한 예산액은 1394만 원밖에 안 됩니다. 샤프심값 절감액까지 더해봤자 고작 2000만 원 수준입니다.
사진= 디시인사이드 캡쳐
알고보니 2011학년도 수능 샤프의 샤프심의 강도가 유달리 낮아 작은 압력에도 쉽게 부러졌고, 심을 지지하는 연필 끝 파이프의 지름이 샤프심보다 0.15㎜나 넓어 너무 헐거웠던 나머지 샤프심이 더 쉽게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이후 교과평의 한 관계자는 “저희들은 전문가가 아니어서 기술적인 부분은 몰랐다. 최저 입찰제는 저희가 반드시 지켜야되는 지침이기 때문에 (그 부분만 지켰다)”고 밝혔습니다. 샤프심이 ‘쿠쿠다스’처럼 부숴지든 말든 ‘최저가 입찰’만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험생들의 마음을 쿠쿠다스처럼 부숴버린 2011학년도 샤프는 훗날 ‘저혈압 방지용’ 샤프로 불립니다. 저혈압 환자도 이 샤프를 쓰면 분노로 혈압이 올라 저혈압을 방지해준다는 우스갯 소리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현재 바른손 홈페이지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 가운데 ‘제니스’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그 이후...
결국 ‘피꺼솟(피가 거꾸로 솟게 하는)’ 2011학년도 수능 샤프 이후 교과평은 초심으로 돌아와 입찰에서 유미상사를 낙찰합니다. 그리고 앞서의 ‘미래샤프’는 ‘E미래샤프’라는 다른 버전으로 나오지만, 품질에선 이전의 미래샤프와 큰 차이가 없다는 평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2012학년도부터 올해 치루게 되는 2018학년도 샤프 모두 유미상사에서 제작됐고 이 샤프들은 가까운 문구점 또는 ‘다이소’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길이 14㎝에 두께 11㎜밖에 안 되는 이 수능샤프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년시절 대입만을 목표로 달려온 고등학교 3학년생 또는 N수생들에게는 희노애락이 있죠. 또, ‘대입에 성공해야 인생도 성공한다’는 대한민국 정서상 수험생들은 수능 샤프에 괜한 자신만의 사연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수능 샤프가 ‘수능 굿즈’ ‘수능 전리품’ 처럼 여겨지는 것도 아예 이해 못할 현상은 아닙니다.
사진= 온라인 중고시장 ‘중고나라’ 캡쳐
그래서인지 샤프를 수집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됩니다. 온라인 중고 시장 ‘중고나라’에서 수능샤프를 팔고 구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샤프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작년 수능 샤프의 감을 익히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전의 수능 샤프를 구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 만의 ‘수능 샤프 컬렉션’을 모으기 위해서 입니다. 마치 우표 수집처럼 말이죠. 또, 매년 수능 시험 감독관으로 입실하는 교사들 역시 ‘기념품’처럼 이 샤프를 하나씩 가져온다고 합니다.
수능 샤프의 색깔도 매년 화제에 오르기도 합니다. 파란색이 지난 5년 동안 수능 샤프의 고정 색깔이었지만, 2013·2014학년도 수능에는 초록색 계열의 수능 샤프가 제작됐고, 2017학년도 수능에는 분홍색(그 중에서도 ‘핫핑크’)이 제작됐고 2018학년도 수능에도 분홍색(그 중에서도 ‘베이비 핑크’)이 제작됐습니다.
# 2018학년도 수능 샤프는
사진= 트위터 캡쳐
해당 사진이 정말 2018학년도 수능 샤프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교과평에 직접 문의를 해봤습니다. 하지만 교과평은 아직 2018학년도 수능 샤프를 공개한 바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아직 대외비 사항일 뿐 유출할 수 없는 부분인데, 아마도 제조사 또는 그 외의 다른 경로에서 유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도 수능 치던 그 날을 기억합니다. 수능 샤프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찍기의 신’이 강림하기를. 부디 올해 수능 샤프는 2011학년도 수능 샤프처럼 말썽 부리지 않고 우주의 기를 모아 수험생의 ‘찍기’를 도와주길 바랍니다. 수능 샤프가 ‘아픔의 상징’이 아닌 ‘승리의 상징’이 되길, ‘수능 전리품’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