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5] 한·일이 함께 나눴던 교류와 평화 시대의 기억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한·일 최초의 공동 등재 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진은 지난 6월 부산 용두산공원 일대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행사. 연합뉴스
지난 10월 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정식 명칭은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17~19세기 한·일 간 평화 구축과 문화 교류의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통신사란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로, 여기서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기록물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통신사를 통한 한·일 교류의 기록으로, 외교기록 5건 51점, 여정 기록 65건 136점, 문화교류 기록 41건 146점 등 양국의 기록 총 111건 333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부산문화재단과 일본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가 공동으로 신청해 등재된 한·일 최초의 공동 등재 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선통신사는 두 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던 한·일 간 선린우호의 상징으로,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인류가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처음 통신사 교류가 시작된 1607년은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에 조선이 침략국인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기까지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는 통신사 파견 여부를 두고 조정 대신들이 수년간 선조대왕에게 올린 주청이 수록돼 있는데, ‘불공대천의 원수’ ‘만세의 적’ 등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이 고스란히 담긴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 화의 교섭의 결렬로 정유재란(1597)을 겪었던 조선으로선 일본의 사절 파견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사명대사 유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교섭을 통해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귀국했고, 이를 계기로 양국의 국교는 사실상 수복됐다. 그 이후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게 된다. 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경사나 쇼군(將軍)의 계승이 있을 때 일본을 방문해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고베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인 내조도’ 모사본. 일본 에도시대 중기 조선통신사 행렬 모습이다. 연합뉴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 등 총 400명에서 500명으로 구성된 대사절단이었다. 통신사에게는 직급에 따라 인삼을 나눠주어 여행 경비로 쓰도록 했으며, 이를 신삼(信蔘)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는 제2회 및 제12회 방문 때를 제외하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출발해 일본의 수도 에도까지 오갔는데, 반년 이상이 걸리는 왕복 약 3000km의 여정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긴 여로의 곳곳에서 일본의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시와 그림 등을 남기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통신사에 포함돼 일본에 다녀온 관료들의 경우, 큰 과실이 없는 한 승진을 시키는 게 관례였는데, 이는 힘든 여행길에 대한 보상의 의미이기도 했다.
일본의 관료와 문인들은 교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통신사로 온 조선 관료는 물론 문필가와 화가에게 다양한 선물을 했다. 때때로 이 선물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관료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11월 16일자에는 당시 통신사를 맡았던 문신 윤지완의 행적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윤지완은 몸가짐이 매우 엄하여, 추호도 누(累)가 되는 행동이 없었다. 왜인과 만나서 오로지 신의(信義)로써 하고, 하는 말이나 처리하는 일들도 모두 엄중하며, 멀리 내다보는 헤아림과 깊은 식견이 있어, 왜인들 중에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 왜인이 그가 한 개의 물건도 가지지 않은 것을 보고, 굳이 ‘선물을 가지고 갈 것’을 청하니, 윤지완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백한(白鷳)(꿩과의 새)은 우리나라에 없는 새이니, 가지고 갈 것이다’ 하고서, 한 쌍을 가지고 와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뒤에 왜의 사절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영조 때 조선통신사의 정사를 맡았던 문신 조엄의 경우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백성의 굶주림을 면하게 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애민정신이 남달랐던 그는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들여와 동래와 제주도에서 재배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마 재배법을 상세히 기록한 <감저보>를 저술해 이를 후대에 남겼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드나들던 교류의 시대에 한·일 양국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평화를 이어갔다. 조선통신사의 ‘통신’이 단절된 이후 두 나라가 서서히 갈등과 반목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든 것은 지금의 양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