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고 지리는’ 신조어로 시청자 눈높이 맞추기…“염려할 필요 없다” 의견도
비는 1단계 문제인 ‘ㅇㅈ’(인정)은 맞혔지만 이후 이어진 ‘버카충’(버스카드충전), ‘띵반’(명반) 등의 문제 앞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프콘은 “팝가수 저스틴 비버의 한국 이름은 ‘뜨또’”라고 가르쳐주자 비는 “거짓말 치지 마. 솔직히 이거 안 쓰죠?”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뜨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 가량 돌려서 바라보면 그의 이름인 ‘비버’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급식체를 아는 이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체계다.
MBC에브리원 ‘주간 아이돌’ 방송 화면 캡처.
10일 방송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포착됐다.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컴백해 조카뻘(?) 후배들과 경쟁을 펼치고 있는 원조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가 초대 손님이었다. MC 박슬기가 첫 문제로 ‘스밍’을 내자 음원 시대에 적응한 그들은 “스트리밍”이라고 쉽게 정답을 맞췄다. 하지만 박슬기가 ‘포카’(포토 카드), ‘혼코노’(혼자 코인 노래방 가기) 등의 뜻을 묻자 “포커 아니냐?” “권투에서 ‘홍코너’를 말하는 거냐?” 등의 반응으로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 급식체 강요하는 TV?
10대들의 급식체 사용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다. 지상파 주요 뉴스에서도 이를 문제 삼고, 한글날을 앞두고는 대대적으로 한글 파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예능 콘텐츠 등을 보면 급식체를 적극 활용하는 모양새다. 예능의 수요 소비층이자 TV 본방송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한 하이라이트 스트리밍까지 챙겨보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전략이다.
자막에서도 어렵지 않게 급식체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말을 지키는 데 앞장 서야 할 지상파 프로그램에서도 급식체 맞히기를 아이템으로 삼으면서 그 내용을 고스란히 자막으로 내보낸다. ‘오지구요’ 혹은 ‘지리구요’ 등의 말투를 사용하는 예능인도 수시로 볼 수 있다.
MBC ‘섹션TV 연예통신’ 방송 화면 캡처.
케이블채널 tvN <SNL코리아>은 아예 급식체를 다룬 코너를 만들었다. ‘급식체 특강’이라는 코너에 배우 겸 방송인 권혁수가 나와서 특정 드라마의 대사를 급식체로 바꿔서 알려주기도 한다. “너무 충격적이거나 아주 놀라울 때 ‘오지다, 지리다’란 말을 사용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인다. ‘머박’이란 단어를 쓴 후 “머박이라고 쓰지만 ‘대박’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머박’과 ‘대박’의 생김새가 비슷한 것에 착안한 급식체라는 의미다.
급식체가 만연하니 10대가 아닌 연령층에서도 이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었다. 부모 세대는 자녀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쓰기도 하고, 20~30대는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급식체를 배운다. 한 방송 관계자는 “예능에서 엄숙주의나 근엄주의가 사라진 지 오래”라며 “급식체를 자주 언급하는 것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트렌드를 반영하자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 급여체도 있다!
급식체 사용을 지적하는 기성세대들에게 혹자는 “급여체도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급여체는 급여, 즉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기성세대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다. 급식체 사용 층은 모르는 그들만의 또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급여를 받는 직장인들은 각 회사의 문화에 따른 대화를 나눈다. 특히 방송가에서는 일본식 표현을 많이 쓴다. ‘야마가 뭐야?’(주제야 뭐야), ‘이번에 입봉이야’(이번에 첫 연출이야) 등이다. 이보다 일반적으로는 쓰이는 ‘어레인지하다’(일정을 잡다), ‘개런티하다’(보장하다), ‘디벨롭하다’(내용을 보강하다) 등도 급식체 사용자들은 모르는 급여체로 통한다.
더 어려운 표현도 있다. ‘SJN’과 ‘GMN’은 각각 사장님과 고문님의 약자다. 유명 정치인을 부를 때 MB, DJ 등 이니셜로 부르는 것처럼 직장인들이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운 대상을 일컫는 과정에서 쓰는 급여체다.
30대 직장인 A 씨는 “회사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기사를 보니 그런 것을 급여체라 하더라”며 “특정 집단 안에 속한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타인의 눈에는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 급식체와 급여체, 얼마나 심각한가?
“요즘 젊은 애들은, 쯧쯧.”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학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을 보며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학생이던 30년 전에는 그들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말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쯧쯧.”
결국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장년층과 신세대 사이에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언어 사용 역시 마찬가지다. PC통신이 인기였던 1990년대 초반 각종 통신언어가 인기를 끌 때도 언어 파괴를 지적하는 기사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표현이 빗발쳤다. 하지만 한글은 지금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급식체, 급여체 사용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특정 시기 특정 세대가 소통과 유대감을 다지는 차원에서 쓰는 언어일 뿐,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과거 ‘웬열’이나 ‘캡’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어를 쓰는 모습에 웃음지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며 “먼 훗날 지금의 급식체 사용을 떠올리며 웃는 날이 올 것이고, 아마도 그때는 또 다른 신조어들이 쓰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