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곳 없는 청년들 엉뚱한 곳에 ‘분노’
▲ 미국 닭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러시아 스킨헤드 집회. 현재 러시아 극우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약 7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지난 2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하얀 늑대들’이란 소규모 극우단체 소속의 러시아 청소년 9명이 살인 및 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단체 두목에게는 23년 형이, 그리고 10대 미성년자들인 나머지 행동대원들에게는 각각 9년 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지난 수년간 최소 11명을 죽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주민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대부분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는 각목으로 때리거나 혹은 칼이나 드라이버로 찔러서 죽인 것으로 드러났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한 노동자는 무려 73차례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스킨헤드들은 폭행을 저지르는 동안 내내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더 악명 높았던 사건은 지난 2007년 발생했던 아르메니아 사업가 카렌 아브라미안(46) 살해 사건이다. 단지 외국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두 명의 스킨헤드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모두 56차례 칼에 찔려 사망했다.
당시 범행을 저질렀던 17세의 아르투르 라이노와 파벨 스카체브스키는 이웃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인근 지하철역에서 체포됐다.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극우단체인 ‘슬라빅 유니온’ 회원이었던 이들은 아브라미안을 살해하기 불과 세 시간 전에도 타지키스탄 출신의 한 남성을 칼로 찔러 죽였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 주었다.
한 극우단체 웹사이트에서 만난 둘은 12명의 스킨헤드들을 더 모은 다음 ‘라이노 갱’이라는 조직을 결성했고, 그 후 2006년 8월부터 2007년 4월까지 9개월 동안 모스크바 곳곳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폭행 및 살인 사건을 저질러왔다. 이들은 주로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출신의 노동자들과 중국인들을 겨냥했으며, 모두 19명을 살해하고 12명을 다치게 한 혐의로 법정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과 함께 기소된 나머지 7명의 청소년들은 모두 6~12년을 선고받거나 일부는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사실 러시아에서 이런 극우단체의 범죄 사건이 벌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스킨헤드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90년대 초반 구소련이 무너지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에 10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 5명이 전부였지만 9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1998년에는 모스크바에 700~2000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 700~1500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불과 1년 사이에 그 수는 더 증가해서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각각 3500~3800명, 그리고 270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극우단체는 ‘슬라빅 유니온(슬라브 연합)’과 DPNI(Movement Against Illegal Immigration)라고 불리는 ‘불법 이주민들에 반대하는 운동’ 등 두 곳이다. 2002년 모스크바에서 창단된 DPNI의 경우 30개 도시에서 5000명가량이 활동하고 있다. ‘슬라빅 유니온’은 러시아 전역에 15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문가들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5만 명가량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불법 이민을 근절하고 러시아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당당하고 정의롭게 싸운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들의 범죄를 휴대폰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 후 다른 지역의 스킨헤드들과 공유하는 것을 재미로 삼고 있다. 가나 출신의 흑인 노동자를 20차례 칼로 찔러 죽이는 동영상의 경우 다른 지역의 스킨헤드들을 선동해서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슬라빅 유니온’의 리더인 드미트리 디오무슈킨(30)은 “러시아 국민의 60%가 우리를 지지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수시로 회원을 모집하고 있으며, 보통 두 달에 한 번씩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숲에 모여 검술이나 사격 실력을 연마하는 합동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스킨헤드 단체가 늘어나니 범죄 사건도 덩달아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 러시아에서는 2004년 인종혐오범죄로 50명이 사망했고 그 수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왔다. 2006년 64명, 2007년 86명, 그리고 2008년에는 96명이 스킨헤드의 범죄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에는 잠시 주춤해서 71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킨헤드의 희생양은 거의 대부분 소수민족이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다.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체첸 등 구소련 연방 공화국이나 중앙아시아 혹은 카프카스 산맥 주변국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동양인들이나 아프리카 흑인들 혹은 동성애자들도 간혹 스킨헤드의 표적이 되곤 한다.
희생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건설현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거나 혹은 청소부들이다. 2007년에는 타지키스탄 청소부가 길거리에서 괴한 두 명에게 35차례 칼에 찔려 숨졌는가 하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한 여성은 지하철에서 내려 일터로 가던 중 갑자기 덮친 러시아 청년들에게 얼굴을 비롯한 온몸을 구타당해서 뇌와 얼굴을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또한 2004년에는 베트남 유학생이 지하철역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으며, 타지키스탄의 9세 소녀는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가슴과 배, 팔 등을 9차례 찔려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 러시아 극우단체 중 모스크바에서 창단된 DPNI의 집회 모습. 이들의 범죄 성향이 점점 흉폭해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 ||
그렇다면 이들 스킨헤드가 러시아에서 갑자기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보통 러시아의 경기 침체와 그로 인한 취업난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2008년 하반기에만 200만 명이 대량 실직했는가 하면, 2009년에는 최소 100만 명이 더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러시아의 과격한 젊은이들이 외국인들에게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겠다는 명분하에 무차별적인 폭력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특히 지난해부터 노골적으로 인종혐오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 젊은층의 약 15%가 극우파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러시아에서 인종혐오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스킨헤드의 범죄가 인종혐오 문제로 부각되는 것을 꺼려하는 까닭에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혹은 체포한다 하더라도 불량배나 훌리건들 혹은 마약 거래조직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소도시 콘도포가에서 발생한 스킨헤드들의 대규모 폭동에 대해서도 당시 러시아 정부는 애써 인종 분쟁이 아닌 반달리즘(다른 문화나 종교 예술 등에 대한 무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으로 치부하면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전역에서 집합한 스킨헤드들과 체첸 이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폭동이었으며, 당시 100명 이상이 체포됐고 이 가운데 3명은 살인죄로 기소됐다. 러시아 법원 역시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긴 마찬가지다. 외국인을 살해한 러시아인들에게 낮은 형량을 선고하거나 가벼운 벌금형만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자 더 이상 모른 체만 할 수는 없게 된 모양. 자국의 여론과 외교 문제를 염두에 둔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내각회의에서 “인종혐오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국가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각 부서의 관리들 역시 이에 동조하면서 지난 몇 년간 이슬람 테러단체보다 극우단체들이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강력한 처벌이나 법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하루 빨리 국가경제를 회복시키고 교육 및 문화에 적극적인 투자를 해서 젊은 세대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라는 것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