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위한 호주행 ‘한국 선수’ 자부심으로 벌써 3년차…어려움 겪는 후배들에게 추천하고파”
팀 동료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이혜천. 사진=멜버른 에이시스
[일요신문] 좌완 파이어볼러 이혜천. 지난 2015년 NC 다이노스 유니폼을 벗으며 KBO 리그에서 모습을 감춘 그는 호주 야구 리그(ABL)에서 세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혜천은 애들레이드 바이트 소속으로 호주 생활을 시작해 2017~2018 시즌부터는 멜버른 에이시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 2016년 7월에는 비슷한 시기에 NC에서 선수생활을 정리한 손민한, 박명환과 함께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호주에서 야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호주 대륙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요신문>은 이혜천으로부터 직접 호주에서의 생활과 그의 야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호주 멜버른에서 지내고 있는 그와 전화통화로 진행됐다.
# 벌써 호주생활 3년차
이혜천은 인터뷰에 앞서 한국에 있는 팬들에게 인사말부터 전했다. 그는 “저를 좋게 기억해주시는 팬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다”고 웃으며 “그래도 계속 저에게 좋은 말씀을 전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들이 있다. 좋은 기운을 많이 받고 있다. 언제까지 제가 야구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 2시즌간 애들레이드 소속으로 29경기에 등판한 그는 올 시즌부터는 멜버른에서 뛰고 있다. 3경기 중 선발로 2회, 마무리로 1회 등판하며 전천후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는 “내 나이가 서른아홉이다. 선발, 중간, 마무리, 셋업 등 다양한 보직을 경험했다. 보직 욕심은 없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보직을 맡고 있는 그에게 팀 내 또 한 가지의 역할이 있다. 바로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돕는 코치로서의 역할이다. ABL은 해외리그 진출을 꿈꾸는 유망주들이 많은 리그다. 이혜천은 이들에게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전수하는 일에 의지를 보였다. 그는 “내가 가진 기술이나 투수의 몸 관리 방법 등 경험했던 부분에 대해서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호주에선 어떻게든 기량을 향상시켜서 미국 진출을 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이나 한국 프로야구의 존재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애들레이드에서는 동료들이 이혜천에게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는 “거기(애들레이드) 선수들이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일부 선수는 일본 스카우트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큰 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9년부터 일본 프로야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2년간 활약한 바 있다. 이때 가까워진 스카우터들과 지금까지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팀 내에서 본의 아니게 코치로 명성을 떨치며 선수뿐 아니라 선수 부모들로부터 구애를 받기도 했다. 그는 “한번은 선수 부모들이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와서 나에게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하더라. 부모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어쩌나. 그 선수를 맨투맨으로 붙어서 봐줬다(웃음)”라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단으로부터 따로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 ‘한국 선수’로서 자부심이 원동력
그런 그가 처음부터 호주 리그에 잘 녹아들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개인주의가 강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혜천이 ‘한국식’으로 다가가자 동료들도 반응을 보였다.
훈련 이후 동료들과 재미삼아 시작한 배팅 게임에서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진=멜버른 에이시스
“애들이 ‘코리안 김치 먹고 싶다’고 하면 데리고 나가서 밥을 몇번 사줬다. 선수들에게 코리안 바비큐가 인기가 많다. 처음에 몇 번 사주니까 심심하면 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안된다고 하니까 다음부턴 ‘캐시(현금)를 가져왔으니 가자’고 하더라(웃음). 더치페이를 하자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 ‘한국은 형님이 많이 산다. 그런데 가끔은 동생도 산다. 이번엔 네가 사라’고(웃음).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열 명이 넘었었다.”
그런 한국식 넉살이 통했는지 지역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애들레이드가 위치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 청소년팀 코치를 맡기도 했다.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황당했다. 처음엔 가서 ‘영어를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거절했다. 그랬더니 감독이 왜 나를 뽑았겠냐고 묻더라. 그러면서 ‘너를 뽑은 이유는 하나다. 너 같은 멘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하더라. 한국 선수 특유의 악착같이 하는 멘털을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감독과 계속 연락하고 지낸다.”
이혜천은 한일전을 예로 들며 한국 선수들만의 강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아시안게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최근 국제대회에서 한일전이 벌어지면 한국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면서 “사실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일본의 저변이나 야구에 대한 다양한 지원을 보면 한국에 진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래도 한국이 이기는 건 선수들이 경기에 ‘전투적’으로 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 그가 호주로 향한 이유
이혜천과 함께 NC에서 은퇴식을 치른 손민한과 박명환은 국내에서 코치직으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손민한은 마지막 소속팀인 NC에서, 박명환은 독립야구단인 성남 블루팬더스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혜천만이 호주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호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수 생활 막바지에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가족을 선택했다. 오랜 기간 가족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왔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코칭스태프로 일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여전히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적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015년부터 ABL에서 공을 뿌린 그에게 이때의 호주가 처음은 아니었다. 선수시절에도 호주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혜천은 “호주에 처음 왔던 게 10년 전쯤 되는 것 같다. 그땐 그냥 몸만들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손민한 선수와도 같이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비시즌 훈련을 위해 찾았지만 선수생활 막바지에 이르며 호주가 달리 보였다. 자신이 야구를 그만두더라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과 문화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선수생활 하면서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보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혜천은 한국에서 고전하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호주행’에 대한 고민을 권했다. FA 계약 총액이 100억 원을 넘어서는 등 덩치를 불리고 있는 프로야구지만 그 이면을 짚었다. 그는 “선수들이 큰돈을 벌 수 있는 분위기가 됐지만 여전히 야구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을 갖고 있는 선수들도 존재한다. 그런 선수들이 미래를 보고 움직였으면 한다”면서 “한 해에도 수많은 선수들이 야구를 그만둔다. 학교 야구부, 사회인 야구팀 등에도 코치 자리가 없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나이트클럽 웨이터나 나쁜 쪽으로 빠지는 친구들이 많더라”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런 후배들에게 호주를 추천했다. 야구 선수만으로는 돈을 버는 상황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지만 야구를 계속 하면서 다른 일을 병행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 16년간의 KBO리그 생활, 특별한 인연
이혜천은 여전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서 공을 던지는 ‘OB 베어스 출신 현역 선수’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그는 1998년 OB에 입단했다. OB는 이듬해 두산으로 팀명을 변경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해오며 많은 경험들을 했다. 그는 화려했던 선수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의 특별한 인연들을 떠올렸다.
화려했던 두산시절. 일요신문DB
“학생 때야 워낙 선배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일이 비일비재했고, 프로에서는 때리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에서도 너무 많이 맞아서 엉덩이가 무감각해지더라. 특히 나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 내 말투에 기분 나빠하는 선배도 많았다.”
힘든 2군 생활에 그는 엔트리가 확장되는 9월만 바라보며 버텼다. 하지만 막상 1군행 통보를 받고는 얼떨떨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첫 경기는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 9-1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첫 상대는 ‘스나이퍼’ 장성호. 그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며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 경기부터는 승리조로 등판했다.
당시 OB 감독은 현재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 감독 이었다. 김 감독은 이혜천이 구속 150km/h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리자 ‘저런 애가 2군에 있었나?’라는 말을 했다. 이혜천은 “나도 지나가다가 감독님이 그런 말씀 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다. 더 이상 맞는게 싫어서 2군에 내려가기 정말 싫었다. 그런 찰나에 감독님의 말씀을 듣게 됐고 더욱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군 생활이 계속됐고 실력도 늘었지만 잠시 2군에 내려가기도 했다. 데뷔 후 2년 정도가 흐른 시점에 팔에 통증이 있어서 2군에 10일 정도 내려가게 됐다. 오랜만의 2군행에 다소 긴장하기도 했던 그는 이때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그때는 신인 때랑 나에 대한 대우가 다르더라. ‘이게 1군 선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나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불펜에 올라가도 ‘던질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묻더라. 원래 2군 선수는 던지라면 던져야 한다. 그래서 더 이 악물고 하는 계기가 됐다.”
1군에서의 첫 룸메이트는 현재 두산 지휘봉을 잡고 있는 김태형 감독이었다. 김 감독에게는 고마운 기억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 김태형 감독님이 ‘너는 우직하게 던지는 게 마음에 든다’고 해주셨고 잘 챙겨주셨다. 내가 포수 리드대로 잘 따르는 편이긴 했다(웃음). 그래서 감독님이 포수로서 책임감이 더 생긴다고 하셨다. 내가 안타를 맞아도 매번 감독님이 대신 혼났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김태형-이혜천 배터리를 보살피던 인물은 포수 코치를 맡고 있던 김경문 NC 감독이다. 이혜천은 “김경문 감독님 덕분에 2009년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며 “감독님이 흔쾌히 ‘많이 배우고 와라’라며 보내주셨다”고 했다. 그는 국내로 복귀할 때도 김경문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던 두산을 택했다.
이처럼 현역 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들과 인연을 맺었던 그가 국내에서 코치 등으로 활약할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한국 프로야구로의 복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이혜천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그는 “다른 거 있겠나”라며 “일단 몸이 허락하는 한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며 “현재 젊은 선수들에게 내 경험과 기술을 전하는 일도 잘 됐으면 좋겠다. 좋은 선수들을 더 큰 무대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거 있겠나. 가족에게 충실하면서 아이들에게 아빠 노릇 잘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라며 웃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호주 야구리그는? 유망주들 모이는 윈터리그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 호주 야구리그(Australian Baseball League, ABL)는 구대성이 지난 2010년 활약을 시작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임경완, 이혜천 등이 잇달아 호주로 넘어가며 ‘노장 선수들이 경력 연장을 위해 찾는 리그’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하지만 ABL은 그보다 유망주가 실력향상을 위해 찾거나 재활이 이뤄지는 ‘윈터리그’ 개념으로 열린다. 실제 메이저리그 유망주들도 겨울이 되면 호주를 찾는다. 2012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MVP 델몬 영(푸른 유니폼)과 이혜천. 사진=멜버른 에이시스 올 시즌에는 지난 2012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한 델몬 영이 멜버른 에이시스 구단에 합류해 이혜천과 함께 활약하고 있다. 일본의 유망주들도 일본 프로야구 시즌을 마치고 호주를 찾기도 한다. 현재 멜버른 에이시스에도 3명의 일본인 선수가 소속돼 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