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할머니도 ‘왕따’였다
▲ 일본 국왕의 손녀 아이코 공주가 우산을 쓰고 나가노역에 서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 ||
얼마 전, 일본의 가쿠슈인(학습원)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가쿠슈인은 메이지 시대였던 1877년, 왕족과 귀족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도록 세워진 관립학교였다. 지금은 일반인들도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왕족들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왕세자 부부의 장녀인 아이코 공주(8) 역시 가쿠슈인 초등부 2학년이다. 아이코 공주의 정식 호칭은 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이다.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의 첫 자녀로, 아키히토 일왕의 세 번째 손녀이기도 하다. 왕세자 부부가 인공수정을 통해 8년 만에 어렵게 얻은 자녀로, 태어나자마자 큰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그 후 오랜 기간 매스컴에 드러나는 것을 꺼려 자폐증 혹은 발육 부진 등의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왕세자 부부가 아이코 이후 8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이코 공주는 차대 일왕의 후보로 올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여자는 일왕이 될 수 없다’는 일본의 왕실법도를 바꿔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일왕 후보까지 거론되었던 그가 얼마 전 등교거부를 하면서 가쿠슈인 초등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왕따 등의 문제가 화제로 떠올랐다.
가쿠슈인의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지난 2일, 아이코 공주가 학교를 조퇴하려는 순간 옆 교실의 남학생 2명이 복도를 내달리자 그러한 난폭한 행동이 무서워 쇼크를 받은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일본의 <주간문춘>은 동료 학생들이 일본왕실에서 존칭만 들어온 아이코를 ‘오마에(야 혹은 너라는 반말)’라고 부르는 것은 예사라고 전했다. 또한 개구쟁이들에게 목을 조이는 ‘헤드록’을 당하거나 머리채를 잡히는 수난도 당했다고 폭로했다.
어쨌든 아이코 사건으로 가쿠슈인의 명성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학부모들은 초등부 학생들의 수준저하를 지적하고 나섰다. 자녀를 가쿠슈인 초등부과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면접시험을 받는 도중에 모친의 진주 목걸이를 끊은 아이가 ‘집안 파워’ 덕분에 합격하는 것도 봤다”며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한편에선 학부모들에 대한 지적도 있다. 어떤 학부모는 “가쿠슈인에 마사코 왕세자비가 왔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학부모도 있다”고 증언했다. “부모라는 사람들의 도덕 수준이라는 것이 그 정도니 자녀들이 올바르게 클 수 있겠냐”는 것이다.
가쿠슈인 측에서도 아이코 공주의 입학을 앞두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카메라와 연동한 IC카드도 그 일환이었다. 등하교시 IC카드 신호가 왕실로 전달되면 카메라를 통해 아이코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학급 편성도 예전에는 세 반에 각 44명이 있었지만 2006년부터는 네 반의 33명 규모로 변경했다.
하지만 결국 작년 12월 나루히토 왕세자의 동생 아키시노노미야 왕자 부부는 자녀를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소속 유치원으로의 진학시켰다. 왕실 저널리스트는 “지금 생각해 보면 가쿠슈인에서 소동이 일어났던 시기다. 아키시노노미야는 가쿠슈인에 교사로 있는 동급생이 많다. 이런 소동을 미리 알고 피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왼쪽은 엄마 마사코 왕세자비와 할머니 미치코 왕후의 젊은 시절. AP/연합뉴스 | ||
미치코 왕후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신분이었다.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의 제분회사를 경영하던 쇼다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대학교육까지 받은 그녀는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지만 부모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일왕의 신부 후보로 지목되면서 둘은 테니스코트에서 첫 만남을 시작했다. 테니스코트에서 미치코를 본 아키히토가 사랑을 느끼고 청혼을 하게 됐다는 로맨틱한 이야기지만 실은 만남부터 결혼까지가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미치코를 평민 출신의 신데렐라로 대대적인 홍보를 했고, 신데렐라 스토리는 보수적인 일본왕실의 개방과 민주화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홍보의 좋은 수단이 됐다. 꿈을 포기하고 어렵게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일반인이 왕세자비가 되는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시어머니인 당시의 나가코 왕후가 일반인과 왕세자가 결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가코 왕후가 유럽방문을 떠나는 자리에서 아들인 아키히토에게만 인사를 주고받고 며느리 미치코는 무시하는 장면이 화면에 그대로 잡히면서 미치코의 호된 왕실 시집살이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커져나갔다.
한번은 왕실파티에서 미치코를 제외한 모든 여성들이 짜고 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오는 바람에 미치코 혼자서만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 있어야만 했던 적도 있다. 왕실의 괴롭힘으로도 모자라 언론까지 미치코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들을 실어대자 그녀는 1993년 자신의 공식적인 생일파티에 가기 직전 갑자기 쓰러진 뒤 실어증을 보이다 94년에 겨우 회복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치코가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각한 미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치코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의 신부후보에 또다시 평민인 마사코가 지목되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옥스퍼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마사코는 처음엔 결혼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세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 왕세자비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결혼 후 마사코 역시 출산문제로 왕실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다.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인공수정을 하는 등 8년간의 노력 끝에 아이코 공주를 얻었지만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산에 대한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출산에 대한 스트레스로 그녀가 우울증을 보이자 언론에서는 왕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왕세자비에 대해 ‘적응장애’ 등의 병명을 대며 비난했다.
일본 왕실에서는 일본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주목을 이끌어내 그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길 원했고 일반인과 왕세자의 사랑은 화제를 몰고 오기에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래서인지 ‘왕실의 왕따’ 논란이 발생하는 이유가 이제 상징으로만 남아있는 왕실이 그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몸부림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지혜 해외정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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