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바이러스’ 아직 잠복중
▲ 아사하라 교주 | ||
옴진리교는 1984년 도쿄에서 요가도장을 운영하던 아사하라 쇼코에 의해 시작됐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일본대표였던 페마 걀포와 접촉한 아사하라는 그의 도움으로 1987년과 1988년에는 달라이 라마 14세와 인도에서 접견을 한다. 그는 이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달라이 라마가 “일본에 참된 불교를 전파하라”고 말하는 모습을 광고의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옴진리교는 ‘절대자유’ 상태에 이르기 위해 개인 재산을 교단에 기부하고 단체생활을 강요했다. 또한 옴진리교의 신자들이 1995년 아마겟돈을 극복하고 천년왕국을 영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법무성’, ‘외무성’, ‘자치성’, ‘과학기술성’ 등 정부기구와 다름없는 조직 구조를 만들었다. 해외에도 뉴욕과 모스크바를 포함한 총 4개 지부를 두었다.
한편 옴진리교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테러를 당하고 교단을 탈퇴한 신자들이 납치,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은 교단에 대해 전면수사를 실시한다. 이에 아사하라 교주는 경찰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독가스테러를 지시했다.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 도쿄도내의 지하철 히비야, 마루노우치, 치요다 세 노선, 총 다섯 개의 전차에 사린을 살포한 것이다.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은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대참사로 기억됐다. 사건이 일어난 이틀 뒤, 검찰이 옴진리교를 강제조사 한 결과 교단 본부에 사린을 생성하는 제조물과 독성 화학물질이 있었다. 모스크바 지부에는 헬리콥터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화학가스뿐 아니라 세균, 핵무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온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결국 신자들이 맹신했던 아마겟돈은 일어나지 않았고, 교단의 주요간부들은 사형수, 지명수배자 혹은 과거를 숨긴 채 일상생활로 돌아가 살아가고 있다. 교주인 아사하라는 현재 살인 등 13건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법정에서의 증언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전해진다. 교단에는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 고위 국가자격증을 취득한 자들뿐 아니라 도쿄대, 와세다대학원 등 고학력의 젊은 층 신자들이 많았다. 20대의 대부분을 옴진리교와 형무소에서 보냈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쿄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의 재원이었던 노다 나루히토는 재학 중 옴진리교를 접하고 중퇴를 결심, 출가해 교단에 전념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과 직접 관여되어 있지 않아 실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옴진리교의 새로운 이름인 알레프의 간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블로그에 “아사하라를 사형시켜라”라는 글을 써 교단에서 제명당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탈교한 신자들이 보통 생활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교단에 남은 신자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교단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옴진리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혁명인가, 전쟁인가>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 1995년 지하철 사린사건 현장. | ||
‘논쟁의 천재’라고 불리며 교단 내 외무성 대표로 활약했던 조유 후미히로는 와세다대학원 출신의 수재였다. 그는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TV에 출연해 교단과 사건이 무관함을 주장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별거가정에서 자란 나는 친구의 가정이 항상 부러웠다. 그래서 옴진리교에 들어가는 편이 승자의 그룹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아사하라는 약시인 데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외로운 소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자신의 비뚤어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교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건 발생 당시 교단과 사건이 무관함을 주장했던 것은 연기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옴진리교에 모체를 둔 종교집단인 히카리노와의 대표로 활동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옴진리교의 신자이 만든 히카리노와는 아사하라 쇼코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 아님을 주장했지만 설립 직후 경찰의 수사에서 아사하라의 사진 등이 발견됐다. 일본 경찰국에서는 히카리노와에 대해 ‘옴진리교 조유파’ 혹은 ‘교단조유파’라고 부르며 위험집단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옴진리교의 테러일지
변호사건 장관이건 눈엣가시는 ‘킬’
일본 사상 최악의 테러집단으로 기억되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범죄는 지하철 사린 사건 외에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사건으로 요약된다.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 살해사건=처음 옴진리교의 이름을 일본 전역에 알리게 된 사건이다. 1989년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 세 명이 돌연 행방을 감추자 변호사가 근무하던 요코하마 법률사무소에서는 옴진리교와 연관이 있다고 판단, 수사를 의뢰했다. 사건의 발단은 교단의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강요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아들이 사카모토 변호사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교단의 문제가 심각성을 깨달은 변호사는 반사회성 등을 문제 삼아 교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아사하라 쇼코 교주는 “사카모토가 교단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며 신자들에게 그를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마츠모토 사린사건=1994년 6월 27일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마츠모토시의 주택가에 사린이 발포되어 8명이 사망, 6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조사본부는 제1제보자였던 고노 요시유키를 중요 용의자로 지목해 주택수색을 벌였지만 집에서 압수한 약품류로는 사린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됐다. 그 또한 이 사건으로 부인을 잃었지만 용의자로 보도되며 언론으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사건은 그 다음해 일어난 지하철 사린사건으로 체포된 옴진리교 간부의 자백으로 교단의 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구니마츠 장관 저격사건=1995년 3월 30일 오전 8시 30분, 자택을 나온 구니마츠 다카지 장관이 잠복해있던 남성에 의해 저격당했다. 4발 중 3발이 복부에 명중해 전치 1년 6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준비해 둔 자전거를 타고 도주했다. 옴진리교의 신자이자 경시청 순경이었던 남성이 용의자로 떠올랐고 자백도 받아냈지만 진술이 사실과 빗나가는 점이 많아 입건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시효가 끝난 시점에서 경시청이 기자회견을 통해 “옴진리교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라며 “신자 8명이 용의자”라고 수사결과를 공표했다. 시효가 만료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지혜 해외정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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