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자판기’ 배치 논의중…“성 인식 바꾸는 계기” vs “까진 애로 낙인 찍혀”
올해 초 발표 예정인 서울시의 ‘인권정책 기본계획(2018~2022)’ 초안에 따르면 청소년에게 콘돔을 지급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청소년들의 원치 않는 임신 등 청소년 보건 사각지대를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겠다는 것. 이에 따라 시는 학교, 보건소 등 공공기관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콘돔 자판기를 시범 운영할 방침이다.
시에 따르면 학교 내 콘돔 자판기 설치 계획은 이번에 처음 논의된 사안으로 인권 관련 자문위원단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시는 자료집 초안에서 ‘청소년의 건강권은 학교나, 가정의 가시화된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내밀한 부분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며 ‘하지만 이에 대한 공적 관심은 열악한 상황’이라고 그 필요성을 밝혔다.
이 같은 계획에 청소년들은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다. 일부는 ‘적극 찬성’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오히려 거부감을 나타내는 청소년도 있었다.
지난해 3월 광주 동구 충장로의 한 성인용품점 앞에 설치된 청소년만 이용할 수 있는 콘돔자판기. 연합뉴스
지난 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학원가에서 만난 김 아무개 양(15)은 ‘학교 내 콘돔 자판기 배치’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김 양은 “학교가 남녀공학이긴 한데 생각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라며 “남자친구 생겼다고 하면 주변 친구들은 선물로 콘돔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양은 “콘돔을 구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의 특성상 공공기관에서 이를 나눠준다면 좋은 취지 같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강 아무개 군(18)은 관련 기사를 본 적 있다면서 “좋은 방법”이라고 답했다. 그는 “요즘 청소년들 콘돔 없어서 비닐봉지 씌우고 성관계 한다더라”며 “편의점에 눈치 보며 가서 구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당당하게 구매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말했다. 강 군은 일각의 ‘청소년 성관계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의식한 듯 “(청소년들) 성관계를 하는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는데 여전히 콘돔은 성인용품이란 인식이 강하다. 이는 오히려 그동안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 없었다는 반증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기존 성교육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이들도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성교육이 실질적으로 학생들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고등학교 1학년 최 아무개 군(17)은 “(콘돔 자판기 설치는)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될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며 “이제는 학교에서도 선생님들 없이 영상만 틀어주는 성교육 말고 콘돔 사용법, 피임약 성분 같은 유용하고 실질적인 것들을 당당히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이 아무개 양(18)도 “남학생들의 경우 장난삼아 여학생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성에 대한 인식을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심어준다면 이 같은 장난도 없어지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시의 결정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여의도 학원가에서 만난 고등학교 1학년 김 아무개 양(17)은 학교 내 콘돔 자판기 설치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주변에서 성관계하는 애로 낙인 찍힐까봐”라고 설명했다. 김 양은 “학교도 작은 사회인데 자판기에서 콘돔을 사는 걸 들킨다면 창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학교 3학년 성 아무개 군(15)도 “(학교에서 콘돔을 구할 수 있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며 “선생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먼저 궁금하다”고 말했다. 성 군은 “여전히 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는데 설치한다 해도 누가 당당하게 그걸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이민혁 군(19)은 “이미 충분히 편의점·약국에서도 구매할 수 있는데 굳이 학교에까지 자판기를 설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며 “제대로 된 성교육 없이 막상 콘돔 자판기만 학교에 놔둔다면 아마 저 같은 남학생들 열의 일곱은 물을 넣어 터트린다든지 장난감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학교 성교육 시간에 보다 더 정확한 성교육과 피임, 출산에 관한 교육을 해 준다면 (콘돔 자판기 설치는)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으론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일요신문DB
지난해 서울, 광주 등지에서 ‘청소년을 위한 콘돔 자판기’를 설치한 소셜 벤처 이브콘돔 측은 학교 내 콘돔 자판기 설치가 구체적인 피임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브콘돔 측은 “10대는 누군가의 자녀, 형제, 가족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라며 “10대의 안전을 위한 결정에 꼭 당사자의 소리가 반영되길 바라며 10대의 기본적인 인권이 늦게나마 꼭 존중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부 단체에선 반대가 거세다. 한국성과학연구협회는 지난해 12월 29일 성명서를 통해 반대의 뜻을 명확히 했다. 협회는 “청소년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돕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진정 청소년을 위한 정책인가 묻고 싶다”며 “청소년들의 임신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콘돔을 무책임하게 나눠주는 정책이 아닌 올바른 성가치관과 윤리의식 교육과 함께 책임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보건교사회도 같은 날 성명을 통해 청소년에게 콘돔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서울시의 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보건교사회는 “체계적인 성교육이 부족한 현재의 공교육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콘돔을 무상으로 공급받게 되면 이는 청소년의 성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고 밝혔다. 특히 “성교육에서 피임교육보다 책임교육이 먼저 중요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콘돔 무상지급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시는 최근 불거진 논란에 조심스런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학교 내 콘돔 자판기 설치 계획은) 인권정책 기본계획 초안에 나온 내용으로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게 없다”며 “이달 말 발표 예정으로 현재까지 계속 논의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와 관련해선 아직 확보된 예산도 없고 관련 부서도 없는 상태”라며 “아직 확정된 게 없는데 언론에 먼저 이야기가 흘러나와 당혹스런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