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읍이 끝나는 지점에 고려궁 시절 내성의 서문이 남아 있다. 성문 앞에서 좌회전하여 고려산으로 갈수 있다. | ||
정상의 높이는 해발 436m. 마니산 469m에 비해 약간 낮은 정도다. 하지만 오르기로 치자면 마니산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마니산의 긴 능선이 주로 암릉으로 이루어져 걷기가 팍팍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비옥한 흙으로 덮인 고려산 능선길은 밟는 느낌이 푸근하기까지 하다.
마니산을 흔히 민족의 영산이라 한다. 그러나 고려산의 비중은 마니산을 능가한다. 강화도 최초의 유적인 고인돌이 고려산 중심 반경 4㎞ 이내에 몰려있는 것부터가 민족사와 고려산의 긴 인연을 말해준다.한반도는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중심지대다. 현재까지 보고된 전세계의 고인돌 5만5천여 기 가운데 절반이 넘는 2만6천 기가 우리나라에 모여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고인돌군 가운데 하나인 강화고인돌군은 강화군 하점면과 내가면 지역에 있다. 강화도의 1백27기 고인돌 가운데 1백2기가 하점, 내가면, 송해면 등 고려산 반경 4km 이내에 몰려있다.
강화도에는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삼랑성) 등 단군관련 전설이 전해오는 유적지들이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백두산과 아사달(평양)에만 연고를 갖고 있는 단군왕검의 흔적이 어째서 이곳 강화도에 남아있을까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에 비해 고려산 주변의 고인돌들은 단군의 시대와도 일치할 수 있는 청동기 이전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강력한 권한을 가진 왕권, 최소한 부족장 이상의 세력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흔들릴 수 없는 근거들이다.
▲ 몽골에 항전하던 39년간 강화는 어엿한 고려제국 의 수도였다. 위쪽은 고려궁터, 아래쪽은 고려산 낙조대다. | ||
고려산. 어찌해서 한 왕조의 이름을 담은 산이 일개 섬 안에 있단 말인가. 강화도를 자주 찾는 사람들도 이곳이 한때 나라의 수도가 있던 왕도(王都)였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고려산이라는 이름은 그러한 ‘망각’을 깨우쳐 준다. 고려산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곳이다. 하나는 국화저수지 인근 청련사로 오르는 길이고 하나는 내가면 적석사로 오르는 길이다.
하점면쪽 백련사에서 오르는 길도 있는데 이 길은 사실상 폐쇄돼 있다. 정상에 있는 군사시설 때문이다. 강화도 북단이 2~3km 폭의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황해도 개풍군과 접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강화도에서도 북부에 속하는 고려산 중턱에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그리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산 정상을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어 정상을 밟을 수 없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고려산 줄기 남단의 봉우리, 멀리로 바다를 끼고 강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볼수 있다는 낙조대가 있는 곳은 적석사 뒤편이다. 적석사의 옛 이름은 적련사. 고려산의 세 절,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라는 이름 사이에는 무언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멀리 고구려 장수왕 때 일이다. 본래 삼한에 속해 있다가 고대 백제에 속하게 된 강화도, 갑비고차는 장수왕과 개로왕의 일전에서 백제가 패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이 시기에 5개의 절이 고려산에 세워졌다고 한다.
장수왕 4년(416), 천축국(인도)의 고승이 장수왕의 청을 받고 절을 세울 만한 터를 찾아 멀리 함경도에서부터 지세를 훑어가며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당시 혈구군, 혹은 갑비고차라 불리던 강화도 끝까지 오게 되었다. 고승은 간절히 기도를 하며 밤을 지새게 되었는데 홀연히 백발 노인이 나타나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라 했다 한다. 날이 밝아 정상에 올라간즉 산 꼭대기에 신기하게도 연못이 있고 거기에 하얗고(백련) 파랗고(청련) 붉고(적련) 노랗고(황련) 검은(흑련) 다섯가지 색의 연꽃들이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각각의 연꽃들을 꺾어 허공에 날리니 오색의 연꽃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둥실둥실 날아갔다.
이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각각 절을 세우고 연꽃의 색깔에 따라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 황련사와 흑련사라 불렀다 한다. 지금 남아있는 절은 적련 청련 백련사 세 곳이다. 이중 적련사는 언젠부턴가 모르게 적석사로 이름이 바뀌었다.장수왕 때 다섯 개의 절이 세워진 고려산 자락에서 고구려 말기에 걸출한 영웅이 탄생한다. 바로 연개소문이다.연개소문은 어릴 적부터 이 산 기슭에서 태어나 말을 타고 산을 오르내리며 기개를 키웠다. 정상의 오련지에서는 말에게 물을 먹였을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중국의 사서 등에서 종종 고려로 기록된다. 고구려와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고려산이란 이름은 옛 고구려를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선사시대의 무수한 고인돌 문화와 함께 고구려의 기상을 간직한 고려산은 정작 고려제국과의 인연은 기구하다.
고려산에 남아 있는 가장 직접적인 고려인의 유적은 고려황제 고종의 능일 것이다. 청련사 입구에서 적석사 입구로 가는 길 중간, 강화읍 국화리에 고려고종릉인 홍릉(洪陵)이 있다. 그는 고려의 거의 마지막 황제다. 몽골에 함락된 뒤로는 명칭이 왕으로 격하됐으니까.
1231년 몽골의 첫 번째 침략에 여지없이 무너진 고려황실은 곧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로 수도를 옮긴다. 이때로부터 39년동안 강화도는, 비록 피란 정부의 임시수도이긴 하지만 어엿한 고려제국의 왕도(王都)가 되었다.강화 천도를 위해 미리 행궁을 조성하고 성을 중심으로 궁성에 준하는 내성과 외성도 쌓았다. 현재 강화읍 중심에 남아있는 고려궁지와 고려성의 흔적은 이때 지은 왕궁의 자취들이다.
▲ 광성보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강화해협을 따라 쌓은 요새다. 아래 왼쪽은 고려산 청련사, 오른쪽 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부근 리 고인돌 | ||
당시는 이미 무신정권이 들어선 지 50년이 지난 때로 최충헌에 이은 최우의 정방정치가 행해지던 시기다. 실권없는 황제 고종은 임시수도 강화에서 백성없는 군주로 불운한 시일을 보냈다. 함께 피란중이던 어머니 원덕황후(강종비)를 강화도에 묻었고, 최씨 정권에 의해 폐위됐던 21대 황제 희종 역시 이 시기에 별세하자 강화도에 묻어야 했다. 원과 화의한 뒤에는 태자를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그 자신 곧 이곳에서 승하하여 고려산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고려의 강화항쟁기간 동안에 또 하나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강화에서 탄생한다. 몽골의 침략과 함께 기존에 조성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자 부처의 원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각종 불경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것.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무려 5천2백만여 자의 경전을 팔만여 장의 목판에 새긴 대역사였다.
그 서체나 내용도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한다. 강화읍에서 남쪽으로 4km쯤 떨어진 선원면에 팔만대장경 판각지가 있다. 고려산과는 떨어져 있지만 강화도 들어가는 길에 한번은 들러볼 만하다. 현재는 대장도감이 설치됐던 선원사 옛터가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지만, 우선 지어놓은 작은 선원사 법당 아래 유물전시관을 들러볼 수 있다.
고려산에 오르는 가장 잘 알려진 코스는 청련사-정상-낙조봉-적석사 코스다. 적석사에서 시작해도 좋지만 오후에 청련사으로 올라 해를 안고 걸으면 해질녘 낙조봉에서 서해 일몰을 볼 수 있다.청련사로 가기 위해서는 강화읍을 관통해야 한다. 시가지가 끝나는 곳에 성문이 하나 서 있는데 고려궁 시절 내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다.
서문 앞 삼거리에서 서문을 마주보는 쪽, 강화고등학교 방향으로 좌회전. 1km를 못가 국화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가 끝나는 곳쯤에 마을회관이 있다. 여기서 마을길로 접어들면 좁은 길이 산으로 향한다. 찻길이 끝나는 곳에 청련사가 있다. 대웅전이란 글자 대신 ‘큰 법당’이란 한글 현판을 단 절집이 이채롭다.
주차장 앞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정상 가까이서 군부대에 막혀 있으므로 우회로를 따라 반대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군 헬기장을 지나면 억새 평원이 펼쳐지며 앞이 남서쪽으로 탁 트인다. 경사가 완만하며 전망좋은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면 고천리 고인돌들이 나타나고 솔밭삼림욕장과 다시 억새능선을 지나 낙조봉에 이르게 된다. 낙조봉 아래 작은 해수관음상을 세운 낙조대가 있고 여기서 돌아서면 적석사가 나온다.청련사-정상-고인돌군-낙조봉-적석사 코스 3시간30분 소요.
좀더 가볍게 등산을 하려고 한다면 청련사에서 차를 돌려나와 찻길로 계속 진행한다. 내려가자. 국화저수지에서 고비고개라 부르는 고갯길로 오르게 되는데 고개 오르기 전 고려 고종 홍릉과 청소년 야영장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고개를 넘어서면서 왼쪽 혈구산에 변화산수도원이 나타나고 고개 바로 아래 오른쪽으로 고려산휴게소가 나온다. 작은 상점이므로 놓치지 말고 차를 세우자. 산행에 필요한 비상간식은 여기서 마련해야 한다. 휴게소 바로 옆으로 적석사 입구가 나오기 때문이다.여기서 산행을 목표로 하는 단체들은 대개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한다. 마을회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연촌마을을 지나 산에 오르면 정상 아래 억새지대로 연결되는 능선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낙조봉쪽으로 왼쪽 능선을 따라 가면 된다.
고려산휴게소-연촌마을-삼거리-고인돌군-솔밭-억새지대-낙조봉-적석사-고려산휴게소 코스는 2시간 정도 소요. 적석사 032-932-6191. 홈페이지 www.juksuk.co.kr